교양· 상식. 심리

이시한 / ‘지식 편의점(흐름출판)’중에서

송담(松潭) 2021. 7. 7. 16:02

< 1 >

 

이름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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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은 상당히 제한적입니다. 1945년 이전에 존재했던 한국의 성은 250개 정도라고 해요. 그중에서도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이 대다수일 정도로 쏠림 현상도 심하고요. 그래서 한국 성씨는 성씨 자체보다는 본관과 연결 지어서, 그 성이 유래한 지역과 같이 써서 구분합니다.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안동 장씨처럼요. 그러니까 한국 성씨는 조상들이 유래한 지역을 나타내는 특징이 있는 셈이에요.

 

사실 냉정하게 보자면 한국에서 성은 극소수만 누릴 수 있는 특혜였습니다. 대다수는 성 없이 이름으로만 불렸습니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를 보면 조선 초기만 해도 인구의 90퍼센트가 성씨가 없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성이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부터인데, 왜란과 호란 이후 성씨와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해 군역을 져야 했기 때문에 양반과 결탁해서 호적과 족보를 위조하는 트렌드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황현이 저술한 역사책 『매천야록』에 따르면 조선 후기 홍선대원군이 전주 이씨 인구를 의도적으로 늘려 세를 불리기 위해 성씨가 없던 백성 중에서 전주 이씨를 희망하는 자들에게 모두 전주 이씨를 쓰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이때 전주 이씨가 무려 10만 명이나 늘어났다고 해요. 왕의 가문이라 아주 희귀할 것같은 전주 이씨가 주변에서 흔하게 눈에 띄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이름은 어떻게 지었을까요? 보통 일반 백성들은 성없이 이름으로만 불렸거든요. 이때 이름은 개성을 나타내기보다는 서로를 구분 짓기 위해 부르는 것이라, 성의 없이 구분만 되도록 짓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3월에 태어나면 삼월이, 어린여자아이는 줄여서 언년이, 돌아다니는 하인은 돌쇠, 잘 먹는 하인은 먹쇠 이런 식으로 불렀어요. '쇠'는 소인의 준말인데요, '소인네'가 줄어서 '쉰네'같이 쓰거든요. '쇠'에 관해서는 또 하나의 설이 있습니다. 쇠가 곧 금(金)을 뜻하기에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하게 살라는 의미에서 붙여줬다고도 해요. 혹은 신체적 특징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크면 큰놈이, 작으면 작은놈이, 강아지처럼 생긴 사람은 삽사리, 느림보처럼 보인다고 뭉투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 2 >

 

링컨 노예해방의 진실

 

 

『앵무새 죽이기』는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민감한 문제이고 없어져야 할 문제인 인종차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계속 회자되는 작품입니다.

 

노예해방이라는 사건은 아득히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지만 따지고 보면 160년 정도밖에 안 된 일입니다.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을 하지요. 하지만 이 노예해방 선언은 그야말로 선언이었을 뿐, 실생활에서 노예라는 개념이 사라진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뒤였죠.

 

무엇보다 노예해방의 동기 자체부터가 실제적으로 흑인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진정한 해방 운동으로서의 가치하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었어요. 링컨은 굉장한 인권 보호자처럼 생각되곤 하는데, 사실 링컨이 노예해방 기조에 동참한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농업 위주의 남부와 상공업 위주의 북부 중 바로 북부의 표를 얻기 위해서죠. 남부의 농업은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북부의 상공업은 자유민인 소비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거든요. 그러니 북부는 노예해방을 지지했고, 남부는 노예제도의 존속을 지지했습니다.

 

링컨이 노예해방을 천명하고 나선 것은 노예해방을 원하는 여론이 더 우세했기 때문이고요, 남부와 전쟁을 벌인 이유는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반기를 들고 연방 탈퇴를 선언한 남부연합군을 무력으로라도 미국이라는 테두리 안에 잡아두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미국인이 좋아하는 대통령 1위로 뽑히는 사람입니다. 이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노예해방이라는 인권적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에요. 사실 미국은 필요할 때만 '인권'이라는 명분을 가져다 붙이는 나라고, 실제적으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나라입니다. 실제적으로 미국 국민들의 입장에서 링컨의 가장 큰 공로는, 분열해서 작은 나라들로 갈라지려는 미국을 전쟁을 해서까지 하나로 잡아놓아 지금의 연방제를 확립시켜놓은 것입니다.

 

링컨은 1862년, 그러니까 남북전쟁 중에 <뉴욕 트리뷴>에기고한 글에 "내가 단 한 사람의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고도 미국을 구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또한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킴으로써 미국을 구할 수 있었다면 역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들 중 몇 명만 풀어주고 미국을 구할 수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그러니까 링컨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연방으로 유지하는 데 최우선의 가치를 두었고, 당시 그 방법이 바로 노예해방이었던 겁니다. 1858년 링컨은 연설 중에 "백인과 흑인이 정치· 사회적으로 평등하게 되는 것에 찬성하지 않으며, 찬성했던 적도 없습니다"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2020년에만 해도 미국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억울하게 흑인이 사망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서 코로나19 와중에도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 시위가 일었죠. 그리고 얼마 뒤 흑인 아버지가 아들이 보는 앞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총을 쏜 경찰의 말은 뿌리 깊은 인종차별적 시각을 보여줍니다. "흑인이 뒷자리에 아이를 태우고 있어서 유괴하는 줄 알았다"고 했거든요. 그냥 변명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꾸며낸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가 변명거리로 머릿속에 떠올랐다는 것 자체가 인종차별적 시각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미국의 노예해방은 아직 완료된 것이 아닙니다. 노예해방 선언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에 가까울 뿐, 실제로 하루아침에 인종차별을 없애지는 못했죠. 인종차별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래서 「앵무새 죽이기」가 초· 중·고 교과 과성에서 읽어야 하는 책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 아닐까요.

 

 

< 3 >

 

노인과 바다

 

 

노인이 고기를 잡았다가 상어 떼에게 다 뜯겼다.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입니다. 이 단순한 줄거리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어니스트 혜밍웨이의 최고 소설 중의 하나이며, 헤밍웨이가 프리처상, 노벨문학상을 받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 소설입니다.

 

노인은 왜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간 걸까요? 그리고 왜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죽을 위험에 처하면서도 고기를 잡은 걸까요? 놀랍게도 이 책에는 그 '왜?'에 대한 직접적인 답은 없습니다. 여든 살이 넘은 노인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고기가 잡히지 않았는데도 오늘도 내일도 그저 고기를 잡으러 나갑니다. 엄청나게 큰 청새치가 잡혔지만 목숨과 바꿀 수 있는 위협에 몰리면서 그 고기를 잡는 게 이득일까. 가져가려면 어떻게 가져가야하는 고민 따위는 없습니다. 소설에선 청새치 길이가 5.5미터정도로 묘사됩니다. 이 정도면 무게가 700~800킬로그램 정도 나간다고 해요. 말하자면 배보다 큰 고기를 노인 혼자서 감당하기가 애당초부터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노인은 재거나 따지지 않아요. '왜?'에 대한 고민 없이 그냥 합니다.

 

미래에 대한 거창한 계획 없이 그냥 오늘, 내일을 열심히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모습과 노인의 고기 잡는 모습은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창한 비전이 점점 희미해져가는 나이가 될수록, 그리고 2년 전 여름과 올 여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랐는지 설명하기 곤란할 만큼 평범한 나날들이 익숙해져 가는 나이가 될수록 노인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눈앞의 고기를 잡는 것 외에 달리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겁니다.

 

노인의 고기가 상징하는 바는 어려움일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어려움은 가난, 실업, 늙음처럼 이 책을 읽을 때의 자신의 나이와 환경에 맞게 제각각입니다. 어쨌든 이런 어려움은 우리에게 닥친 현실들이죠. 그 현실을 넘어서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현실에 잠식당해 실망스러운 결과를 손에 받아들고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 눈앞에 현실은 살아내는 것.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 우리 인류가 '인생'이라는 우리 자신보다 큰 물고기를 견디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비록 그 결과물은 상어들에게 뜯겨서 남는 게 없습니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죠. 열심히 살아왔지만, 남들이 "뭐 잡았냐?"고 물어봤을 때 자랑스레 내 인생에서 어떤 것을 이루었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초연하게 하루하루의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것, 그러면서 그 일상에 영혼을 지배당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노인과 바다』를 보고 또 보는 이유일 겁니다. 노인은 이런 말을 하죠.

 

"파멸당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

 

인생이란 원래 승산 없는 싸움입니다. 누구나 죽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서 얘기하는 파멸이 곧 육체적인 의미라면, 패배는 정신적인 의미입니다. 어떤 어려움도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불골의 의지, 그 의지는 특별한 사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쿠바 어촌 마을의 80세 넘은 노인 산티아고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 4 >

 

페르마의 정리를 향한 350년의 여정

 

 

수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수수께끼이며 독일의 사업가 볼프스켈이 이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에게 10만 마르크를 주겠다고 해서 유명해진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아마이 책을 보시는 분들 정도의 지적 수준이라면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아실 거예요. 직각삼각형에서 두 변의 제곱의 합은 빗면의 제곱과 같다. 그러니까 'x +y'=z"'이죠. 이걸 조금 확장시켜서 이렇게 쏩니다. x"+y"=z"', 이때 n이 3 이상의 정수일 때, 이 방정식을 만족시키는 정수해 x, y. z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페르마의 정리예요.

 

* 위 수식(밑줄 친 부분)은 컴퓨터 작업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x‘제곱미터’등 수식을 표시할 수 없어 부정확하고 형태만 나타냈음.

 

 

페르마의 정리가 증명되기까지 350년이나 걸렸다는 것은 그만큼 중간에 실패한 경험이 많다는 얘기잖아요. 어떤 사람은 자신의 평생을 이것을 증명하는 데 바치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이들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거죠. 이 증명이 이루어진 것은 결과이지만, 그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과정이라는 것이 필요하고요, 때로는 그 과정만으로도 값진 도전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하지는 못했지만, 도전했던 과정 하나하나가 모두 현대 수학 이론을 발전시키고 확립하는데 큰 시금석이 됐거든요. 마치 연금술 같죠. 사물을 금으로 만들고 싶은 결과는 이루지 못했지만, 연금술사들에 의해서 결국 화학이 발전했듯이 말입니다.

 

"거인의 어깨"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전에도 존재한 말이지만 최종적으로는 과학자인 뉴턴이 말해서 유명해졌는데 그대로 옮기면, "내가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이룬 업적은 선인들의 지혜 위에 쌓여진 결과라는 뜻인데요. 그만큼 우리는 착실한 과정을 거쳐서 원하는 목적지에 다다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원하시는 어떤 일을 앞에 두신 분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의지와 시간을 불태우며 과정을 쌓아 결국 결과에 이르는가를 깨달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평생에 걸쳐 시간과 열정을 바칠 만한 하나의 과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유명해진 계기는 앞서 언급한 볼프스켈이 증명하는 사람에게 10만 마르크의 상금을 걸면서인데, 볼프스켈은 젊은 시절 실연을 당해 자살을 생각했다고 해요. 그래서 하루는 생각한 대로 실천에 옮기려고 결심하고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정확히 몇 시에 죽으려고 일정을 정했답니다. 그린데 자신이 정한 시간까지 약간 시간이 남아 기다리다가 페르마의 정리를 접하게 되고 밤새 그 풀이를 고민하다가 자살할 시간을 놓쳤다고 하죠. 그러고서는 삶에 의욕을 회복하고 유서 찢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페르마의 정리를 푸는 사람에게 10만 마르크를 주겠다고 상금을 건 거든요. 볼프스켈을 구한 것은 그가 순간적으로 몰두한 구체적인 일이었습니다.

 

해야 할 일이 분명한 사람은 쉽게 좌절하거나 지치지 않습니다. 뭘 해야 하나 고민하는 게 사실 가장 힘든 일이니까요. 젊은 시절 그렇게 열정을 바쳐 이루어 나갈 과업을 찾는다면, 그 인생은 참 축복받은 인생인 것 같은데요, 그런 과업을 찾기 위에 열정을 다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지금 만약 자신이 할 일,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을 못 찾았다면 그래서 그런 부분이 고민이라면, 그런 일을 찾는 것 자체가 지금 주어진 과업이다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 5 >

 

그리스인 조르바

 

 

 

니체의 위버멘쉬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서 도대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인물이 어디 있으며, 어떻게 보면 정신 나간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왜 세계 명작의 반열에 오르는가 의문을 갖는 분들이 많

습니다. 사실 조르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벗어나 이 소설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만나야 할 사람이 바로 니체죠.

 

니체가 말한 위비멘쉬ubermensch, 한국말로는 초인이라고 번역하는 바로 이 초인의 실현태가 조르바입니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쳇바퀴 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데, 이를 깨뜨릴 사람이 바로 규범이나 관습, 그리고 책임에 얽매이지 않는 위버멘쉬죠.

 

그런데 이 초인의 단계를 그냥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낙타에서 사자로, 그리고 어린아이가 되죠. 자신의 짐도 아닌 짐을 지고 아무 생각 없이 사막을 건너야 하는 낙타의 단계가 가장 밑바닥인데, 이는 보통 이성을 가지고 사는 일반인들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남의 짐을 날라야 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자가 됩니다. 사회의 의무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고 주관적이고 주체적이긴 하지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불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상태죠. 이성이 발달하고 자아가 강한 인간입니다. 마지막 단계가 바로 어린아이인데요, 어린아이는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억압받거나 구속도 당하지 않는 순진무구한 존재잖아요. 이를 초이성적인 존재로서 생각해 어린아이가 마지막에 다다르는 초인의 단계입니다. 이런 개념을 가지고 조르바를 보시면 바로 조르바가 이런 단계를 사람으로 묘사한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되실 거예요.

 

마냥 부럽지만은 않은 자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조르바가 바람직한 인간상일까요? 초인의 실현은 바람직할지 모르지만, 개개인의 해탈에 가까운 이 개념으로 사회라든가 도덕, 규범을 설명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러면 사회, 관계가 없는 행복은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죠. 가족도 버리고, 아무데나 떠돌며 내키는 대로 하는 조르바의 자유가 마냥 부럽지만은 않은 이유입니다.

 

마초macho라는 말이 있잖아요. 마초는 원래 스페인어로 '남자'라는 뜻인데, 지금은 폭력적이고 위압적으로 여성들을 비방하거나 비하하는 여성 차별주의자, 혹은 남성 우월주의자 정도의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초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형태가 잘 안 떠오르시면 조르바를 보면 됩니다. 조르바가 사실 마초적 인물이거든요. 여자를 감정을 교류하는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고, 도구로만 대합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에게 조르바는 평이 갈리는 인물이에요. 초인이라는 개념으로 보는 경우나 그렇지, 우리같이 평범한 낙타들이 보기에 사실 조르바는 제멋대로이고, 여자만 밝히는 사람이니까요. 이 소설의 서술자 역시 그런 조르바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잖아요. 마지막에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갑자기 날아온 조르바의 편지를 받고도 조르바에게 당장 달려가지 않으니까요.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자유롭게 사는 영혼을 부러워합니다.

 

조르바의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에 주목해서 조르바를 부러워하시는 분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조르바의 자유를 부러워하는 거죠. 조르바의 자유는 사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유를 위해 버려야 할 것이 너무 많죠. 그래서 직장이나 자식이나 사회적 위치가 어느 정도 정리되는 나이가 되어서야 초탈한 모습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구속할 것들이 조금씩 없어지니까요.

 

 

< 6 >

 

죽음의 5단계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라는 심리학자는 1969년 『죽음과 죽어감』이라는 그의 책에서 임상을 통해 정립한 죽음의 5단계를 소개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앞에 죽음이 가까이 놓인 것을 인지하면 5단계의 심경 변화를 거친다는 거죠. 그리고 이 단계는 불행하거나 슬픈 소식을 접할 때도 적용되기 때문에 슬픔의 5단계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죽음의 5단계에서 첫 번째 단계는 부정 Denial 입니다. 암 선고를 받은 사람이 검사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다른 환자와 검사결과가 바귄 것은 아닌지, 의사가 돌팔이응 아닌지 의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분노Anger 입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며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을 원망합니다. 배우자, 가족, 친구, 직장, 신 등 그 대상은 광범위합니다.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 원망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말로 칼을 갈면서 원망을 표현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상처받기 쉬울 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사자가 받은 선고의 무게가 워낙 크기 때문에 대부분은 이해하는 편이죠.

 

세 번째 단계는 협상Bargaining 이에요. 의사에게는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으니 살려만 주세요"라고 말하고, 평소에는 존재조차 믿지 않던 신에게는 “살려만 주시면 남은 인생은 정말 착하게 살겠다"면서 여기저기 생사 여탈권을 쥔 듯한 곳에 타협을 시도합니다.

 

네 번째 단계는 우울Depression인데요, 굉장히 깊은 슬픔으로 빠져드는 겁니다. 자신이 죽음으로 인해 잃을 것들에 대한 슬픔이 있고요, 또 하나 자신의 죽음 때문에 남겨질 가족들에 대한 슬픔이 합쳐지는 거예요.

 

다섯 번째 단계는 수용Acceptance 입니다. 결국 받아들이는 겁니다. 초월한 듯한 느낌도 나고, 또 체념한 듯한 느낌도 납니다. 비교적 담담하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초월적인 상태로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고요, 침묵으로 일관하면 체념으로 받아들인 것이죠.

 

죽음이란 건 누구에게나 외면하고 싶은 삶의 유일한 진실이죠. 인간에게 확실한 미래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 하나뿐이잖아요.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당신도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백발백중의 예언이 되겠죠. 이게 웬 부정적인 소리냐고 할 수도 있지만, 늘 죽음을 인식하고 사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 앞에 죽음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과 자신은 절대 죽지 않을 것처럼 그 미래를 완전히 망각하고 사는 사람의 삶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있어서인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회피합니다. 국정원에서 나온 확실한 주식 정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은 철석같이 믿으면서도 (왜 국정원에서 주식 정보가 나올까 의심도 없이요) 너무나 확실한 미래인 죽음에 대해서는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이나 준비는 나이를 떠나서 필요한 일입니다. 자신의 생을 조금 더 존중한다면 말이죠.

 

이런 생각만으로도 남은 인생을 조금 더 소중히, 그리고 값지게 쓸 수 있습니다. 공기처럼 존재해서 너무나 당연하게 느꼈던 주변 사람들의 고마움 또한 깨닫게 되기도 하죠.

 

이시한 / ‘지식 편의점(흐름출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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