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나도 육십 년 전에는 스물셋이었다오

송담(松潭) 2021. 7. 17. 17:00

나도 육십 년 전에는 스물셋이었다오

 

 

조선시대 유생은 일반적으로 중등교육기관인 향교나 서원에서 학문에 정진한 뒤 과거에 응시했습니다. 과거는 보통 3년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식년시와 특별한 경우에 열리는 별시가 있었습니다. 최종 합격까지는 첫 번째 단계인 소과와 두 번째 단계인 대과를 모두 통과해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소과를 사마시, 대과를 문과라고 불렸습니다.

 

소과는 문장력을 평가하는 진사시경전에 대한 지식을 시험하는 생원시로 나누어지는데, 초시와 복시라는 두 단계 시험을 통해 진사시 100명과 생원시 100명의 최종합격자를 선발했고 이들을 각각 진사와 생원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를 들면 ‘최진사’는 진사시에 합격한 최 씨 양반이고 ‘윤초시’는 초시를 통과한 윤 씨 양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생원 진사가 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생깁니다. 성균관에는 생원, 진사, 사부학당 학생 중 자격을 갖춘 자, 그리고 공신의 자제 등이 입학했는데, 이곳에서 대과를 준비했습니다. 대과는 초시, 복시, 전시라는 3단계 시험을 통해 최종적으로 33명이 합격했으며, 최종 1등 합격자가 바로 장원(壯元)입니다. 특히, 마지막 전시(殿試)는 등수를 정하는 시험으로, 임금이 직접 나와 민생현안에 관련된 문제를 출제했는데, 이를 책문(策問)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책문에 대한 응시자의 답변이 바로 대책입니다. 가장 뛰어난 답안지를 맨 위에 오도록 하여 임금에게 보고한 것을 두고 다른 답안지를 누룬다는 뜻의 압권(壓卷)이라는 표현도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뱃속에 든 시와 책이 몇백 짐이던가

올해야 가까스로 난삼을 걸쳤네

구경꾼들아 몇 살인가 묻지 마소

나도 육십 년 전에는 스물셋이었다오

 

조선 후기 83세로 소과에 급제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지은 시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에 이삼십 년을 바치는 것은 보통이었고, 고종 때는 86세의 역대 최고령 합격자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는 가문에서 3대가 넘어가도록 소과 합격자가 나오지 않으면 더 이상 양반으로 인정되지 않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본인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의 운영을 걸고 과거시험에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여길우/ ‘우리 땅 더 넓고 더 깊게 여행하는 방법(출판 : 여행이 필요한 시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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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향교

 

조선은 건국 초부터 유학을 교육하고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한양에는 성균관과 사부학당을, 지방에는 향교라는 공립 교육기관을 세웠습니다. 향교는 지방 교육체계의 중심이었으므로 나라에서 학전(學田)이라는 땅을 내려 향교 재정을 지원했고, 지방 수령의 일곱 가지 임무인 수령칠사에는 학교 운영에 관한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은 전라도를 관할했던 전주에 세워져 수도 향교라고도 불리며 670여 넌의 역사를 이어온 전주향교로 떠나 향교의 기능과 건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과거 급제를 꿈꾸며 치열하게 공부했던 유생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향교의 목적은 공자를 비롯한 선현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향 기능과 유생들에게 유학을 교육하는 강학 기능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각각 제례 공간인 대성전과 강학 공간인 명륜당을 설치했습니다. 문묘(文廟)라고도 부르는 대성전이 명륜당보다 더 중요한 공간이기에, 평지에 들어선 향교에서는 대성전을 전면에 두었습니다. 이를 전묘후학 구조라고 부르며 성균관과 전주향교가 이 구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사지에 자리하는 향교의 경우에는 후면의 높은 곳에 대성전을 세우는데, 이를 전학후묘라고 하며 오늘날 남아있는 대부분의 향교가 이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전주향교는 1354년 고려 공민왕 때 처음 설치되었습니다. 향교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붉은 홍살문이 우뚝 서 있습니다. 상단에 화살 모양으로 생긴 뾰족한 막대를 꽂고 그 중앙에는 태극과 삼지창을 세위 놓았습니다. 이는 신성한 공간의 시작을 알리고 부정한 것이 들어오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합니다. 홍살문 바로 옆에 서 있는 하마비(下馬碑)에는 '과차자개하마(過此者皆下馬)'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이곳을 지나는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라는 뜻으로, 고을 수령조차도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여길우/ ‘우리 땅 더 넓고 더 깊게 여행하는 방법(출판 : 여행이 필요한 시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