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피아노 / 사랑은 소유하지 않는 것

송담(松潭) 2020. 12. 28. 15:58

피아노 / 사랑은 소유하지 않는 것

 

 

 

영화 < 피아노 > - 1993년 46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미혼모로서 딸을 둔 벙어리 영국 여자 에이다는 뉴질랜드로 이민 간 영국인 스튜어트와 일종의 정략결혼을 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넌다. 결혼하고 보니 남편은 협량한 인물인 데다 땅과 재산에만 관심을 갖는 속물이었다. 그녀는 선택을 후회하지만 방법이 없다. 영국에 있을 때부터 그녀의 유일한 기쁨은 피아노를 치는 것이었다. 온갖 곤란과 위험을 무릅쓰고 피아노를 뉴질랜드까지 운반해 온 것도 다 이런 까닭에서다. 그러나 남편은 그 피아노를 해변에 팽개쳐두고 만다. 집까지 운반하는 데 지불해야 할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다. 피아노는 그래서 한동안 해변에 버려진다. 에이다가 제발 피아노를 집으로 운반해 달라고 통사정을 해보지만 스튜어트는 막무가내다. 할 수 없이 그녀는 남편 친구인 베인스에게 매달린다. 일자무식 농부 베인스가 마침내 에이다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준다. 에이다의 비상한 열정에 거부할 수 없는 어떤 끌림을 느낀 베인스가 스튜어트에게 땅을 줄 터이니 피아노를 자신에게 팔라고 제안한다. 스튜어트는 '이게 웬 떡이냐' 며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에이다는 당연히 완강하게 반대한다.

 

베인스는 설득한다. 에이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자신의 집에서 피아노를 칠 수 있으며, 또 무엇보다 자신이 에이다에게 개인 지도를 받고 싶어 그러는 거라고 이제 피아노를 치려면 에이다가 베인스 집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명분은 언제나 레슨이다. 하지만 이 레슨은 피아노연주 삼매경에 빠져 있는 선생을 일자무식의 제자가 사랑에 취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전부다.

 

에이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어가자 베인스는 단호한 결정을 내린다. 피아노를 그녀에게 조건 없이 되돌려 준 다음 이제는 더 이상 그녀를 만나지 않기로 한 것이다. 피아노를 다시 돌려준다는 말을 듣자 스튜어트가 베인스에게 허둥지둥 달려간다. 주기로 한 땅에 대한 계약에는 이상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에이다가 문제다. 그녀도 어느 사이에 베인스와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베인스의 집으로 갈 명분이 없어져버렸다. 피아노는 이제 자신의 집 안에 있으니 말이다. 마침내 사랑의 목마름을 더 이상 참우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에이다는 피아노를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이스의 품에 안기기 위해 그의 집을 향한다. 오늘도 내일도.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튜어트가 베인스에 대한 접촉 금지를 엄격하게 명령하고 에이다를 감금하다시피 집 안에 유폐해 놓는다. 참담한 절망에 빠진 에이다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베인스가 모든 것을 처분하고 영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러자 그녀는 생명처럼 소중한 피아노 건반을 하나 떼내어 거기에 사랑의 글귀를 적은 다음 베인스에게 갖다 주도록 어린 딸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그런데 철없는 딸은 그것을 베인스 대신 계부인 스튜어트에게 갖다 주고 만다. 배신감으로 이성을 잃은 스튜어트는 에이다의 방으로 한걸음에 내달려, 들고 있던 도끼로 에이다의 손가락을 내리찍는다.

 

그러나 마침내 스튜어트는 에이다를 체념한다. 이제 그녀는 베인스와 영국으로 함께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범선에 피아노를 심고 사랑하는 사람과 영국으로 떠나게 되면서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막 오르려는 순간 갑자기 에이다가 일어선다. 피아노를 바다에 던져버리라고 선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영문 모르는 선원들이 피아노를 바다로 던져넣는다. 이것은 피아노에 연결된 밧줄로 자신의 발목을 미리 묶어두었던 에이디의 자살수순이었다. 그러나 바다로 던져진 피아노와 함께 대서양의 심해로 가라앉던 에이다는 어느 순간 발목의 밧줄을 끊고 다시 수면 위로 오른다. 피아노 연주자 에이다는 죽었고,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 에이다가 태어난 것이다. 심해에서 그녀를 밀어올린 대양은 자궁이었고, 끊어진 밧줄은 탯줄이었다.

 

존재와 소유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두 종류의 인간을 구분한다. 하나는 존재지향의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지향의 인간이다. 존재지향의 사람들은 단지 '어떤 것이 있다' 는 사실만으로 놀라움, 기쁨. 행복을 느낀다. 그들은 길가에 피어난 한 송이 꽃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낀다. 그 꽃이 반드시 내 방 안에 꽂혀 있어야 한다거나 내 정원에 피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또 누군가를 사랑해서 그녀와 살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살아야 한다면 그런 조건을 받아들인다. 그녀가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유지향적인 사람들은 단순히 '어떤 것이 있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것이라야 한다. 내가 소유하고 지배하고 군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수 없는 것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피어 있는 꽃이 아름다우냐 아름답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꽃이 내 것이냐 네 것이냐만이 문제일 뿐이다.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든다면 잠자리를 하거나 함께 지내거나 결혼을 하거나 어쨌든 내 것으로 만들어놓아야 한다. 그래서 소유지향적인 사람들의 마음은 늘 소유와 지배의 욕망으로 시달린다.

 

프롬의 분석에 따르면 문명사의 흐름을 두고 볼 때 화폐와 시장경제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존재지향에서 소유지향으로 바뀌어갔다. 특히 화폐경제 제도의 확산은 이러한 경향에 속도를 더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유양식이 보편화되면서 이제 한 인간의 가치도 그가 지니고 있는 소유물의 양으로써 측정되기 시작했다. 그가 누구냐? 는 물음은 '그가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는 물음을 뜻하게 되었다. 이 위험스러운 징후들이 심지어 일상어에도 반영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가령 영어로 ‘내 아내는 아름답다’ 고 말하는 통상적인 표현은 My wife is beautiful' 이 아니라 ‘I have a beautiful wife’ 로 바뀌어가고 있음이 바로 존재지향의 태도가 점점 더 소유지향의 태도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상적 증거라 말한다.

 

프롬은 소유지향의 삶에서 진정한 행복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소유지향적 인간들의 역설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등장하는 ‘아귀의 역설’ 과 흡사하다. 아귀들은 배고픈 고통에 시달리는 지옥의 귀신들이다. 그들의 괴로움은 먹을 게 없는 데서가 아니라 먹으면 먹을수록 배불러지기는커녕 거꾸로 더 극심한 기아의 고통 속으로 떨어져야 한다는 데서 온다.

 

 

사랑을 위하여

 

그러나 베인스는 다르다. 그의 관심사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가 왜 땅도 피아노도 심지어 에이다까지도 포기할 수 있었던가. 그런 것들의 소유를 사랑한 게 아니라 존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피아노를 위해 땅을, 에이다를 위해 피아노를, 에이다의 행복을 위해 에이다를 포기한다. 그러나 여기서 베인스가 포기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소유권뿐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을 소유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 같은 하늘 아래 어딘가에 그것이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뛸 수 있는 것이다. 베인스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베인스가 30년 동안 살아온 그 땅을 떠나려고 한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에이다가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피아노의 건반을 뜯어내는 것도, 피아노를 통째로 바닷속으로 던지는 것도, 피아니스트로서 죽음을 택하는 것도 모두 사랑을 위한 것이었다. 사랑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궁극적 목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그에 따르는 희생과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랑한다고 믿으면서 선택 앞에서 망설이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소유 앞에서 주저한다.

 

<피아노>의 주인공 에이다는 그런 어정쩡한 위선 속에서 머뭇거리는 우리를 피할 수 없는 물음 앞에 서도록 한다. ‘사랑을 위해 당신은 가장 소중한 것조차 포기할 수 있는가?’

 

이왕주 /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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