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송담(松潭) 2022. 7. 19. 13:56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박정대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 없는 바람은 창문을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그녀의 검은 숲 속

그녀의 숲 속에서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 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 놓는데

내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

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어느 여름날 박정대(朴正大, 1965~ ) 시인은 창이 넓은 서재에서 옥타비오 파스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시원한 여름 바람이 불어와 옥타비오의 책장을 넘겨 버립니다. 문득 시인은 고개를 들어 창 너머 옥탑방을 바라봅니다. 그곳에서 그는 빨랫줄에 걸려서 바람에 날리고 있는 여성의 팬티를 발견합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빠스’로부터 ‘옥탑위의 빤스’로 이행하는 시인의 연상 말이지요.

 

 다시 시인은 옥탑방에 살고 있던 어느 여인과의 매혹적인 사랑, 그 젊은 시절의 열정을 떠올립니다. 그 시절 옥탑방에서 나누던 사랑을 시인은 기본적으로 ‘외상’으로 추억합니다. 보통 육체적 행위는 앞으로 당신과 함께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이루어지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젊은 시절 시인도 매혹적인 여인의 몸을 파고들면서 그런 약속을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와의 사랑이 시인에게 부채감으로 남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옥탑방에서의 사랑이 외상은 외상이되 이제 ‘즐거운 외상’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싱그러운 바람이 불던 어느 날 젊은 시인은 옥탑방이 있던 어느 건물의 옥상에서 ‘하얀 빤스를 널고 있는’ 한 여인을 바라봅니다. 순간 시인은 어떤 상쾌함과 순결함, 아울러 그녀에 대한 강한 욕망을 느끼게 됩니다. 마침내 시인은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어느 맑은 여름날 그녀와 사랑을 나누지요.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러 나간 무료한 시간, 한들한들 맑은 여름 바람이 부는 한낮의 권태로움. 시인은 이 모든 정적을 배경으로 그녀의 몸을 탐닉합니다.

 

 얼마 동안 두 남녀의 육체적 탐닉이 지속된 것 같습니다. 도대체 그, 혹은 그녀의 무엇에 이끌려 절망스럽게 서로를 쓰다듬었던 것일까요? 미래를 함께하자던 약속을 믿고 그랬던 걸까요? 아니면 순간적이나마 욕망의 노예가 되어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의 동물성에 몸을 맡겼던 걸까요? 고민을 거듭하다 보면 우리는 인간의 내면에 깔려 있는 매우 깊은 열망, 즉 합리적인 사유를 통해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근원적인 충동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에로티즘erotism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지금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사회적 금기를 받아드리면서 결혼 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겁니다. 금기를 위반할 수 있는 열정과 몰입의 시간이 이제 너무나 멀리 스쳐간 과거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 문득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바람에 날리는 책장을 보며 추억 속의 옥탑 위의 빤스를 그리워하고 있을 뿐입니다. 시인이 이 작품에서 그리워했던 것은 젊은 시절 사랑을 나누었던 어느 여인이지만, 그가 진정으로 되찾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에로티즘 그 자체일 수도 있겠지요.

 

 강신주 /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