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추사 김정희

송담(松潭) 2018. 6. 7. 17:06

 

추사 김정희

 

 추사는 정신적 수양과 학술적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참된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예서 쓰는 법은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 한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고, 청고고아한 뜻은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가 들어있지 않으면 능히 팔뚝과 손끝에 발현되지 않는다. (... )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서 쓰는 법의 기본이며 그것이 예서를 쓰는 신결(神訣)이다. (전집 권7 잡저, 상우에게 써서 보이다)

 

 추사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였고 철저한 장인정신의 소유자였다. 추사가 글씨를 쓸 때 얼마나 피눈물 나는 장인적 수련과 연찬을 보였는가는 상상을 초월한다. 추사는 훗날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내 글씨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칠십 평생에 나는 벼루 열개를 밑창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네.

 

 

 추사체의 특질, ()

 

 추사체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이제 추사체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때이다. 추사체의 특질을 가장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설파한 글은 유최진의 추사체론이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怪奇)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져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 마음을 격동시키고 눈을 놀라게 하여 이치를 따져본다는 게 불가하다.

 

 서법에 충실하면서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 그것이 추사체이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못 쓰면 추사체라고 우긴다"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이것을 추사 동시대 사람들은 ()’라고 했다. 추사도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글씨를 그렇게 말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강상시절 추사 글씨를 보면 전한시대 예서체를 기본 여기에 행서 또는 전서의 맛을 가미하여 흔히 말하는 추사체의 파격적인 개성미가 완연히 드러남을 실감할 수 있다. 어느 경우든 글자의 구성에는 대담한 디자인적 변형이 있다.

 

 

 

 <일금십연재(-琴十硏齋)>는 비록 종이 현판으로 남아 있는 작품이지만 참으로 조용하고 얌전한 글씨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거문고 하나에 벼루 열 개가 있는 서재'라는 뜻에 걸맞게 단아하면서도 멋스럽다. 변화가 없는 듯 보이지만 변화가 있고, 필획의 뻗고 내려 그은 힘이 그대로 살아 있다. 더욱이 한 일(-) 자를 위쪽에 바짝 붙이는 대담한 구성에서 현대적 세련미조차 느껴진다.

 

 

 

 <사서루(賜書樓)>는 임금에게 책을 하사받은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서재 이름으로, 유득공의 아들 유본학(柳本學)<사서 루기(賜書樓記)>에 근거하여 추사가 유본학에게 써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 역시 예서체의 중후한 골격을 기본으로 행서의 자율적인 변형을 가한 작품으로, 글씨의 머릿줄을 가지런히 하고 하단을 자유롭게 풀어주어 힘과 변화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내리긋는 획은 모두 기둥뿌리처럼 튼튼하게 하고 가로로 삐친 획은 서까래 같은 기분까지 내었다. 추사 글씨의 탁월한 조형미는 여기서 절정에 이른 느낌이다. 이른바 개성으로서 의 미학을 획득한 것이다.

 

추사의 열정과 관용

 

 추사는 기질적으로 대단히 열정적인 분이었다. 그의 왕성한 지식욕과 창작열은 그런 기질이 가장 긍정적으로, 아름답고 위대하게 나타난 부분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박학과 그 양이 얼마였는지 알 수 없는 서예 작품이 이런 열정의 소산이다.

 

 추사는 그 불같은 내적 열정 때문에 보고 는 것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못했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끝까지 알아내고야 말았다. 진흥왕순수비를 찾아내는 집념, 후배 윤정현에게 30년 만에 써준 <침계>라는 작품, 완원의 황청 경해1.408권을 끝내 구하고야 마는 것도 그런 열정의 소산이다.

 

 추사는 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서는 반드시 최고여야 한다는 철저한 완벽주의였다. 조금이라도 부실하거나 불성실한 것을 참지 못했다. 그는 벼루 열 개가 뚫어지도록 글씨를 쓰는 엄청난 훈련을 쌓은 사람답게 제자들에게 구천구백구십구 분을 얻더라도 나머지 일 분까지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가르쳤다. 그는 대가는 붓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진실로 잘못된 말이라며 붓도 양질의 것을 찾아 썼다. 일껏 써놓은 저서를 몇 차례 불태웠다는 것도 이런 완벽주의의 소산이다.

 

 또 추사는 자신이 체득한 학예의 성과를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 세상을 위해 애쓰는 것으로 학자의 사명 또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고자 했다. 그는 소동파의 아버지 소순이 했던 말을 끌어 와서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까지 했다.(전집 권4, 오규일에게 제2)

 

 추사는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과 예술을 함께할 수많은 벗과 제자들로 추사 일파완당바람을 일으켰다. 그런 열정으로 학문과 예술에 임했던 사람은 조선 천지 상하 삼천 년에 다시 없었고, ‘종횡 십만 리중국에도 드물었다.

 

 한편 추사의 열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관용의 미덕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매사에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따져야 했고, ‘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성미 때문에 결국 수많은 적을 만들어 끝내는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유배 가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불같은 열정에 너그러운 관용이 곁들여질 때 비로소 그윽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관용의 미덕을 곁들이지 못했다면 추사의 뜨거운 열정과 개성도 결국은 한낱 기()와 괴()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요, 끝 모르고 치솟던 기개도 어느 정도 높이에서 허리째 부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추사는 그 관용의 미덕을 귀양살이 10년에 배웠고, 그것이 비로소 과천시절 예술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사실 관용과 보편성은 기본적인 인생의 자세일 텐데 그것은 알아도 행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개성을 갖기는 차라리 쉬워도 그것을 받쳐줄 관용과 보편성을 얻기는 매우 어렵다.

 

 

 유홍준 / ‘山崇海深, 추사 김정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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