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山崇海深, 추사 김정희’중에서

송담(松潭) 2018. 6. 2. 14:12

 

초의 스님과의 인연

 

산숭심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추사는 일찍부터 불교, 특히 선()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혹자는 추사의 예술을 선사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에 보이는 해박한 불교 지식, 묘향산에 들어갈 때 <금강경>을 호신부로 갖고 간 것, 노년에 백파선사(白坡 禪師)와 선에 대해 크게 논쟁 한 것 등을 생각하면 과연 추사를 해동의 유마거사라 부를 만했다.

 

 1815년 서른 살의 추사는 서울 북쪽 수락산의 학림암에서 해붕대사(海鵬大師)'()'에 대해 논하며 묵어간 적이 있다. 그때 두 선지식이 벌인 공의 본질에 대한 불꽃 튀는 논쟁은 추사가 훗날 해붕대사 영정에 부친 해붕대사 화상찬에 잘 나타나 있다.

 

 이때 추사는 비어 있음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 보다도 더 보람된 일은 해붕대사를 모시고 있던 초의(草衣) 의순(意恂, 1786-1866)스님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이때부터 떨어질 수 없는 벗이 되었다.완당선생전집에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35)보다 초의에게 보낸 편지(38)가 더 많을 정도이다.

 

 특히 추사는 초의가 보내주는 차를 좋아했다. 이는 추사가 훗날 초의의 차에 답하여 써준 <명선(茗禪)>이라는 작품과 초의의 차를 기다리는 추사의 간절한 편지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우정으로 초의는 추사의 유배시절 제주도로 직접 찾아와 6개월 동안이나 벗해주기도 했고, 추사가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는 또 강상(江上)에서 해를 넘기며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리하여 훗날 추사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초의가 추사에게 바친 제문은 애절하기 그지없다.

 

 초의는 추사와 추사의 동생 김명희, 다산 정약용과 그의 아들 유산 정학연, 해거 홍현주 자하 신위, 위당 신헌 등 추사와 다산 주변 인사들과 학연,묵연, 시연을 맺었다. 당대의 명사들과 친교를 맺으며 높은 학식과 시,,화로 교유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스님의 사회적 지위는 천민인지라 초의는 한양에 와서도 도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동대문밖 청량사에서 추사와 만나거나 편지로 연락하곤 했다.(소치 실록)

 

 

소치 허련(許鍊, 1808~93)

 

 

 추사가 가장 아낀 제자는 역시 소치 허련이었고, 추사를 스승으로 가장 극진히 모신 제자 역시 그였다. 추사는 소치의 그림을 평하여 압록강 동쪽에 소치만 한 화가가 없다라고 했고, 소치는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 갔을 때 세 번이나 찾아가서 몇 개월씩 함께 지내곤 했다. 소치가 추사의 제자가 되는 과정은소치 실록에 이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소치는 진도의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28세 때인 1835, 해남 대둔사의 초의 선사를 찾아가 서화를 배우면서 입문했다. 소치 는 일지암에 기거하면서 대둔사 초입 녹우당에 보존된 공재 윤두서의 그림과 <고씨화보> 같은 화본을 빌려 보면서 그림을 배웠다. 본래 그림에도 높은 재능을 지녔던 초의는 그의 그림을 성심껏 지도해주었다.

 

 

 소치가 초의 밑에서 그림을 배운 지 4년째 되던 1839, 소치의 그림을 평해달라는 초의의 부탁에 추사는아니, 이와 같이 뛰어난 인재와 어찌 손잡고 함께 오지 못하셨소, (....) 즉각 서울로 올려보내도록 하시오라고 답했다. 그리하여 그해 8, 소치는 서울로 올라가 월성위궁 바깥사랑에 기거하며 추사에게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추사는 소치에게 청나라 화가가 원말 4대가의 그림을 방작한 그림을 모은 화첩을 주고 폭마다 열 번씩 본떠 그려보라고 했다. 그렇다고 추사가 사대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는 국적을 떠나 예술 자체의 높은 경지를 지향했던 국제주의 자였다.

 

소치는 추사의 가르침대로 날마다 추사에게 그림을 그려 바쳤다. 그러다 잘된 그림이 있으면 추사는 찾아오는 손님과 제자 중 그림을 아는 사람에게 한 폭씩 나누어주면서 소치를 칭찬해 마지않았다. 이로 인해 소치의 이름은 곧 장안에 퍼지게 되었고, 추사는 원말 4대가 중 한 사람인 황공망의 호 대치(大癡)를 빌려와 제자에게 소치(小癡)라는 호를 붙여주었다.

 

 

 

 

  평양에서 다산에게 수선화를 보내며 

 

 

 추사가 41세 되던 1826, l217일은 부친 김노경의 회갑이었다. 김노경은 한성판윤을 거처 판의금부사로 재직하고 있었고, 추사는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어 금의환향했으니 당시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은 권세의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때 추사가 주위에 보낸 초청 편지가 현재까지 전하고 있으나 이 자리에 분명히 있었을 송수시화첩에 대해서는 아직껏 알려진 것이 없어 안타깝다.

 

 추사의 부친 김노경은 회갑을 지내고 2년이 지난 18287월 평안감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추사는 마침 예조참의에서 물러나 잠시 관직에 있지 않을 때여서 아버님을 뵙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 머물던 추사는 중국에서 돌아오는 사신에게 수선화를 얻어 유배에서 풀려나 남양주 여유당에 있던 다산 정약용에게 보냈다. 이에 다산이 수선화를 받고 지은 시 한 수가여유당전서18에 전한다.(정해렵, 박석무 편역 다산시정선, 현대실학사 2001)

 

 신선의 풍채에다 도골 갖춘 수선화 (...)           仙風道骨水仙花

 추사가 평양의 관아에서 옮겨왔네.                 秋史今移浿水衙

 외진 마을 깊은 골엔 보기 드문 것이어서 (.., )  窮村郶峽少所見

 어린 손자 처음엔 부추인가여기더니               穉孫初擬薤勁拔

 계집종은 마늘 싹이 일찍 났다 놀라누나          小婢驚蒜早芽

 휜옷에 푸른 치마 서로 마주 서 있으니             縞衣靑光相對立

옥골의 향그런 살 혼자서 맡아보네. (..)             玉骨香肌猶自吸

 

 

 그리고 다음과 같은 부기를 덧붙여놓았다

 

 늦가을에 벗 김정희가 향각(평양)에서 수선화 한 그루를 부쳐왔는데 그 화분이 고려자기高麗古器였다.

 

 추사는 다산을 이렇게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리고 그 화분이 고려자기였던 걸 보면 추사는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또 추사가 제주도 유배 시절 수선화를 그렇게 좋아한 데에는 이런 연유가 있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추사가 다산 정약용에게 배움을 구하며 자신의 학문세계를 넓혀갔다는 사실은 완당선생전집에 실린 다산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타나 있다. 추사 집안은 노론의 골수이고 다산은 남인의 간판 격인데 두 석학이 당색을 뛰어넘어 이렇게 학문의 깊은 곳을 논하는 것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실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추사가 다산에게 편지로 경학을 논한 부분은 당돌하게 대들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해서 기고만장하던 시절 추사의 모습이 엿보이기도 한다.

 

 

조인영의 상소와 추사의 유배

 

 

 18406, 병조참관을 지내고 있던 55세의 추사는 동지부사로 임명되는 감격을 맞았다. 꿈에도 잊지 못할 연경에 30년 만에 다시 가게된 것이다. 그 옛날 자제군관으로 갔던 추사가 이제는 동지부사가 되어 연경에 가게 됐으니 그 또한 금의환향이었다.

 

 그러나 이 감격은 일장춘몽처럼 사라졌다 안동 김씨는 아니지만 추사의 저승사자 격인 김우명이 대사간이 되고, 경주 김씨와는 악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안동 김씨 김홍근이 대사헌이 되면서 안동김씨를 주축으로 한 세력이 10년 전 윤상도 사건을 재론하며 이미 돌아가신 부친 김노경을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느닷없이 10년 전 김노경과 윤상도의 옥사를 다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추자도에 위리안치되어 있는 윤상도를 즉시 끌어올려 국문하게 하고 김노경에게도 마땅한 처분을 내리겠다고 하교했다. 이튿날에는 추사와 아우 명 희의 관직을 빼앗고 그 다음날에는 죽은 부친의 관직을 추탈했다.

 

 윤상도를 추자도에서 끌어올려 국문한 결과 윤상도는 전 승지 허성이 시켜서 한 일이라 했고,하성은 김양순의 위협과 사주를 받았다고 자백했다. 811일 윤상도 부자가 능지처참을 당하자 궁지에 몰린 김양순은 김정희가 시킨 일이라고 추사를 끌어들였다. 이리하여 820, 예산으로 낙향해 있던 추사가 나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김양순과 김정희의 대질심문에서 김양순의 말이 거짓으로 드러나자 김양순은 다시 죽은 이화면을 끌어들여 그가 다리를 놓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국문이 계속되는 동안 김양순은 고문 끝에 죽고, 허성 또한 역적모의에 참여한 죄로 죽임을 당하여 결국 김정희만 남아 국문을 받게 되었다.

 

 모두 혹심한 고문에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으니 추사의 목숨 또한 경각에 달린 셈이었다. 이 때 우의정 조인영이 추사와의 끊을 수 없는 정리를 생각하여 94일 정중하고 논리정연한 문장으로 임금에게 상소의 일종인 차자(箚子)를 올렸다. 진실한 벗의 용기 있는 상소였다. 이것이 '국문받는 죄수 김정희를 참작하여 조처해줄 것을 청하는 글'이다.

 

 “엎드려 아뢰옵니다. 신은 이번 국문에 대하여 (..)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에 참여하여 진실로 그 정황을 잘아옵니다. (...) 어찌 성스러운 조정이 가련한 사람을 구원해주는 뜻에 맞을 수 있겠습니까 (..)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재량하여 처리하옵소서

 

 조인영의 차자를 받은 대왕대비는 이를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이제 우의정이 올린 글을 보니 옥사의 맥락과 오점이 매우 분명하다,(,,,) ‘그 의심스러운 죄는 가볍게 벌 한다는 뜻에 입각하여 감사(減死)의 법을 씀이 마땅하다. 국청(鞫廳)에 수금(囚禁) 한 죄인 김정희를 대정현에 위리안치하도록 하라!" (조선왕조실록 헌종 694일자)

 

 대왕대비의 이런 조치가 내려지자 이튿날 예상대로 대사간 김우명을 비롯한 삼사가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합계하여 김정희를 다시 국문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왕대비의 대답은 단호했다.

 “전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 이미 일렀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이리하여 추사는 겨우 목숨을 구해 제주도로 귀양을 떠나게 되었다. 조인영의 도움으로 죽음에서 탈출한 것이다.

 

추사의 산수화

 

 

 소치에게 그림을 가르치면서 아마 추사도 자연스레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문헌을 보면 추사는 오숭량이 비문 읽는 모습을 그린 <추야독비도>를 그렸던 것 같고 또 자화상도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난초외의 산수화는 알려진 것이 아주 드물다. 장년 시절의 <고목한아도>, 제주시절의영영백운도(英英白雲圖)>세한도> 정도만이 명확한 내력과 연도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다만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산수화> 두 폭과 고사소요도(高士逍遙圖)>는 제주도 유배시절 추사가 소치에게 그림을 지도하면서 심심풀이로 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옛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희작(戲作)이라고 했다.

 

 이 그림들은 모두 정통 문인화풍으로 그려졌다. 갈필의 마른 붓질과 초묵(蕉墨)의 까실까실 한 맛이 두드러진다. 고사소요도>는 과연 추사의 그림다운 일격(逸格)이 있고, 원나라 산수화를 방() 했다는 화제가 쓰인 산수화역시 추사가 지향하던 문자향과 서권기가 흥건히 배어 있다.

 

 나는 추사가 산수화를 즐겨 그리지 않았고 잘 그리지도 못 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그의 명작 <세한도>도 거기에 서린 고아한 품격이 좋은 것이지 경물을 묘사한 필치의 능숙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화가들이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과는 반대로 추사는 격조를 먼저 의식하고 그림을 그린 면이 강하다. 머리와 눈이 너무 앞서서 손의 일이 더 중요한 화가는 되기 힘들었다. 이론이 앞서 눈으로 본 것을 그리는 대신 머리로 그린 것을 손이 따라가게 했을 뿐 노련한 기교를 다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추사는 오히려 그런 기교가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추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로움의 경지로 돌아가게 하라." 그리하여 얻어낸 격조라는 추상적인 미적 가치가 추사를 비롯한 문인화가들의 이상이었다. 바로 여기에 문인화가들의 승리와 한계가 동시에 있다.

 

 

 

단연 죽로 시옥 (端硯竹爐詩屋)

 

 

 삼묘라고 낙관된 현판으로는 단연 죽로 시옥 (端硯竹爐詩屋)>이라는 명작이 있다. 단계(端溪) 벼루와 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 그리고 시를 지을 수 있는 작은 집, 이 셋만으로 자족하겠다는 조촐한 선비의 마음을 말한 것이다.

 

 이 글씨는 기본이 예서체이지만 자획의 운용에는 전서기가 많이 남아 있다. 글자의 디자인은 대단히 멋스럽고, 획의 흐름에서 리듬조차 감지된다. 화로 로() 자를 쓰면서 불 화() 변을 아주 작게 붙인 것에서, 이때부터 추사가 글자 구성에 점점 대담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홍준 / ‘山崇海深, 추사 김정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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