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세한도(歲寒圖)

송담(松潭) 2018. 6. 6. 20:32

 

세한도(歲寒圖)

 

 

세한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세한도> 제작 과정

 

 추사 나이 59세 되던 1844, 제주도에 유배 온 지 벌써 5년이 되었을 때 추사는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歲寒圖)를 제작했다. <세한도>는 화제에 쓰여 있듯이 추사가 그의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 것이다.

 

 이상적은 스승 추사가 귀양살이하는 동안 정성을 다해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드렸다. 이에 추사가 그 고마운 마음의 표시로 <세한도>를 그려준 것이다. 추사가 세한도를 그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귀양살이 4년째인 1843년에 이상적이 계복(桂馥)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를 연경에서 구해 제주도로 보내준 것이었다.

 

 이상적은 이듬해(1844)에 또 하우경(賀耦耕)이 편찬한 황조경제문(皇朝經世文編)이라는 책을 보내주었다. 이 책은 자그마치 12079 책으로 그 양도 무척 방대했다. 이상적의 이런 정성에 추사는 감격하고 또 감격했다. 그리하여 주사는 이상적의 변함없는 정에 감사하는 뜻으로<세한도>를 그리고 그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지난해에는 만학대운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우경의 문편을 보내왔도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천만리 먼 곳으로부터 사와야 하며,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단번에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歲寒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松柏]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셨는데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 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 ,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노인이 쓰다.

 

 <세한도>는 누구든 추사 예술의 최고 명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손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리하여 <세한도>에 대해서는 감히 누구도 작품의 잘되고 못됨을 따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신격화되어 있다.

 

 감히 <세한도>에 대헤서 몇 마디 소견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지금까지 <세한도>에 붙인 여러 문사이 글 중에서 크게 잘못 된 부분부터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세한도>에 붙인 찬사 중에는 대정 추사 적거지에 꼭 세한도>에 나오는 집과 똑같은 건물이 있다.”라거나 “ <세한도>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소나무가 있다.”라는 말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이는 가장 터무니없는 얘기이다. <세한도>는 결코 그런 실경산수화가 아니다. 그런 소나무는 어디서나 볼 수 있고, 그렇게 생긴 집 역시 제주도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에 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엔 그런 식으로 원창(圓窓)을 낸 집이 없다. 이 그림의 예술적 가치는 실경에 있지 않다. 실경산수로 치자면 이 그림은 0점짜리다.

 

 <세한도>는 추사 마음속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 있는 격조와 문기(文氣)가 생명이다. 추사는 여기서 갈필과 건묵의 능숙한 구사로 문인화의 최고봉을 보여주었던 원나라 황공망이나 예찬 유의 문인화를 따르고 있다.

 

 이 그림이 우리를 참으로 감격시키는 것은 그림 그 자체보다도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에 있다. 추사 해서체의 대표작으로 예서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반듯한 이 글씨는 필획이 강하면서도 엄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서 가슴에 깊이 박히는 울림을 준다. 더욱 감동적인 면은 서화 자체의 순수한 조형미보다도 그 제작 과정에 서린 추사의 처연한 심경이 생생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림과 글씨 모두에서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했던 추사의 예술세계가 소략한 그림과 정제된 글씨 속에 흥건히 배어 있다는 것이 이 그림의 본질이다.

 

 

 <세한도> 소장자의 변천과정

 

 <세한도> 장축은 이상적 사후 이후 그의 제자였던 김병선에게 넘어가 그의 아들 김준학이 이 시를 읽으며 공부했던 감상기를 두루마리 끝에 적어놓았다. 그 뒤 휘문고등학교 설립자인 민영휘(閔泳徽)의 소유가 되었다가 그의 아들 민규식(閔奎植)이 매물로 내놓아 추사 연구가인 후지쓰카의 손에 들어갔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여름, 서예가이자 서화 수집가로 추사 작품의 최고 컬렉터였던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은 전쟁 중에 후지쓰카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세한도>를 가지고 갈까 걱정하여 후지쓰카를 방문하여 원하는 대로 다 해드리겠으니 <세한도>를 양도해 주십사하고 부탁했다. 그러나 후지쓰카는 자신도 추사를 존경하므로 이를 고이 간직하겠노라고 거절했다.

 

 이듬해 여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후지쓰카는 경성제대를 정년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는 자신의 살림살이와 책은 물론이고 <세한도>를 비롯한 추사 관계 서화·전적을 모두 갖고 도쿄로 돌아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소전은 나라의 보물이 일본으로 넘어가버리고 말았다고 몹시 안타까워 하다가 마침내 비장한 각오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후지쓰카의 집을 찾아갔다.

 

 당시는 미군의 도쿄 공습이 한창인 때였다. 소전은 후지쓰카를 만나 막무가내로 <세한도>를 넘겨 달라고 졸랐다. 후지쓰카는 단호히 거절했다. 소전은 뜻을 버리지 않고 매일 후지쓰카를 찾아가 졸랐다. 그러다 12월 어느 날 후지쓰카는 마침내 소전의 열정에 굴복하여 맏아들 아키나오에게 당신이 죽으면 소전에게 넘겨주라고 당부했으니 안심하고 어서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소전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바로 양도해준다는 말만 기다리며 묵묵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단다.

 

 그러자 후지쓰카는 <세한도>를 간직할 자격이 있는 이는 바로 소전이라며 아키나오를 불러 <세한도>를 소전에게 건네줄 것을 명했다. 그는 선비가 아끼던 것을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보상도 받지 않겠다며 잘 보존만 해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소전은 마침내 <세한도>를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소전은 일본에서 돌아온 뒤 <세한도>를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가 5년이 지나 어수선한 정국이 가라앉자 조용히 이 사실을 관계자들게 알리고 세 명사에게 발문을 받았다. 추사 예술 연구의 제일인자라 할 위창 오세창 선생과 추사 학술 연구의 제일인자였던 위당 정인보, 당시 부통령으로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던 성재 이시영 선생 세 분이었다. 세 분 모두에 <세한도>의 감격적인 귀환을 칭송했다.

 

 그러나 훗날 소전 손재형이 국회의원 선거 출마로 선거 자금에 쪼들리면서 그의 수장품 중 겸재의 <인왕제색도>금강전도> 당시 삼성물산 이병철 사장에게, <세한도>는 사채업자에게 저당잡히고 말았다, 소전은 끝내 돈을 갚지 못해 소유권을 잃었다, <세한도>는 이후 미술품 수장가인 손세기에게 넘어갔고, 지금은 그의 아들인 손창근씨 소장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

 

 위창은 <세한도>에 발문을 쓰면서 민족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소전의 열정적 행동을 이렇게 칭찬했다.

 

 세계에 전쟁 기운이 가장 높을 때 소전 손재형 군이 훌쩍 대한해협을 건너가 많은 돈을 들여 우리나라의 진귀한 물건 몇 가지를 사들였는데 이 그림 또한 그 가운데 하나이다.

 

 폭탄이 비와 안개처럼 자욱하게 떨어지는 가운데 어려움과 위험을 두루 겪으면서 겨우 뱃머리를 돌려 돌아왔다. 감탄하노라. 만일 생명보다 더 국보를 아끼는 선비가 아니였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잘하고 잘 했도다.

 

 유홍준 / ‘山崇海深, 추사 김정희중에서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논어한 겨울 추위가 지난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의 제발(題發)이기도 해서 익히 알고 있는 것이지요. <세한도>는 제주로 귀양 간 추사가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에게 보내준 그림입니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해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 가지 않는다는 세태를 따지면 유배지, 그것도 바다 건너 제주에 유배된 추사는 이미 끈 떨어진 갓이었지요. 그러나 제자 우선은 권세를 따르는 세속과는 달리 궁경(窮境)의 스승에게 사제의 의리를 지켰기에 추사는 그 마음이 고마웠을 것입니다.

 

 <세한도>를 볼 때마다 추사의 높은 경지보다 이상적의 사람됨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 삶일 수 있다면, 그런 삶을 꾸려갈 수 있다면 더없이 고맙고 행복한 일이겠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추사처럼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줄 작은 울타리가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기쁜 일 아니겠습니까. 누군가에게 그렇게 소나무 잣나무 한 그루쯤 되게 살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을 품어봅니다.

 창문을 여니 청량한 바람이 둔한 머리와 마음을 두드리며 깨웁니다.

 

 김경집 / ‘마흔 이후, 이제야 알게 된 것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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