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서의 자화상
한국을 대표하는 자화상으로 윤두서의 그림을 꼽는데 주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18세기 초 조선시대 선비 화가인 그의 자화상은 우리 회화사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기도 한다. 더 나아가 동양인의 자화상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 그림은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제일 먼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강렬한 기를 내뿜는 그의 눈빛이다. 일차적으로는 눈썹이나 눈의 모양이 호랑이상이어서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들 정도로 안광을 뿜어낸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마치 살아있는 것같이 세세하고 생생한 묘사가 한층 강렬한 기운을 만들어 낸다. 보통 눈동자를 전체적으로 검게 처리하기 십상이지만 자세히 보면, 윤두서는 동공과 홍채를 구별하여 그리고 있다. 심지어 홍채의 가는 결까지 보이는 듯하다. 다음으로 그림 앞에 선 사람을 순식간에 긴장시키는 게 수염이다. 장비처럼 사방팔방으로 뻗쳐 있는 구레나룻, 턱수염, 눈썹, 콧수염을 한 올이라도 놓칠세라 정성스럽게 그려 놓았다. 수염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듯이 펼쳐져 있어 더욱 강한 기운을 만들어 낸다. 입술은 허튼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듯이 곽 다물고 있다. 이 모든 요소가 한데 모여 강렬한 인상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확고한 신념과 불굴의 의지로 가득 차 보이는 자화상이지만 정작 윤두서 자신은 조선시대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 모진 고초를 당했다. 특히 윤두서가 이 자화상을 그리고 있었을 시기는 온갖 어려움이 겹겹이 쌓여 있을 때였다. 이 그림은 윤두서가 46세인 1713년쯤에 그려졌다. 그즈음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줄곧 불행한 일을 겪었다. 남인에 속했기 때문에 서인과의 극심한 당쟁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될 수박에 없었다. 셋째 형 윤종서가 귀양 중에 사망했고, 윤두서 자신도 큰형 윤창서와 함께 모함에 연루돼 죽을 고생을 했다. 온갖 풍파에 시달리다 출세의 뜻을 꺾고 고향으로 내려온 터였다.
그래서인가 강인한 인상 뒤로 언뜻 쓸쓸함이 스친다. 우리가 윤두서의 삶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림을 보기 때문일까? 쓸쓸함과 고독이 언뜻 비추어지기는 했을지언정 자화상에서 절망이나 동요의 그림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눈빛이 흐려진 기억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을 것 같은 완강한 인상이다. 실제로 그는 절제와 극기에 있어서 남다른 의지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자존심이 강했고 그림에서도 숨김없이 드러나듯 성격적으로 치밀했다고 한다. 여기에 조선시대 사대부의 엄숙함까지 더해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인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화가 스스로도 의식적으로 당당한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박홍순 / ‘미술관 옆 인문학’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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