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체의 종류
글씨는 같은 글자라도 쓰는 사람의 글씨를 쓰는 목적이나 취향, 품격 등에 따라 그 모양과 양식이 달라지고, 문자향(文字香) 등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그로 해서 같은 글씨를 놓고도 ‘…체’라고 부르게 되는데, 이 때의 ‘…체’, ‘…체’ 하는 말 역시 각각 다른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글씨체’라고 했을 때는 다음 두 가지 뜻으로 풀이되는 것이 보통이다.
첫째, 같은 글자를 쓰는 데도 쓰는 사람의 글씨 쓰는 목적이나 취향 등에 따라 다른 모양(서체)의 글씨를 쓰는 경우이다. 이 때는 글씨가 지닌 품격보다는 밖으로 드러난 글씨의 양식이 주가 된다.
한자의 경우, 고대 한자 서체인 전서(篆書)를 비롯하여, 중국 한나라 때의 예서(隸書), 한자의 일점·일획을 정확히 독립시켜 쓰는 해서(楷書), 해서를 약간 흘림글씨로 쓰는 행서(行書), 그리고 이들 글자의 일부 자획을 생략하여 흘림글씨로 쓰는 초서체(草書體) 등을 가리키며, 한글의 경우는 궁체(宮體) 등의 서체를 가리킨다.
다음은 글씨의 필치, 곧 글씨가 지닌 기운이나 운치 등을 이를 때 쓰는 말이다. 이때는 서풍(書風)·필체(筆體)라고도 하며 글씨의 양식보다는 글씨의 품격 등을 고려한 서체가 주가 된다. 곧 한자의 경우 ‘왕희지체(王羲之體)·‘구양순체(歐陽詢體)·‘안진경체(顔眞卿體)’, 초서의 ‘손과정체(孫過庭體)’, 한국에서의 ‘추사체(秋史體)’ 등의 서풍을 가리킨다.
서예에서는 특히 글씨의 양식보다는 글씨의 품격과 문자향 등을 높이 사고 있어 같은 글씨라도 그 글씨가 지닌 필치, 곧 글씨의 품격에 따라 많은 차이를 두고 있다.
● 전서(篆書)
1 .대전(大篆)--서주(西周) 중기 기원전 9세기
은(殷)나라의 갑골문이 주(周)나라 때에 이르러 크게 바뀌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대전이라고 하며, 주나라 선왕(宣王)이 당시 태사(太史)인 사주에게 명하여 만든 글씨체이다. 일반적으로 소전(小篆)이전의 글자와 글씨체를 통털어 부르는 명칭이다.
점과 획의 범위가 복잡하고, 조형미가 있다. 주문(주文)이라고도 부른다. 일설에 의하면 고조선의 배달환웅께서 신지(神誌)에 명하여 전서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2. 소전(小篆)--진시황(秦始皇) 기원전 3세기
그 후 춘추전국시대에는 각국이 서로 다른 글씨체를 사용하였으나,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승상인 이사(李斯)에게 명하여 만든 글씨체이다. 대전을 가다듬어서 둥글게 굴려서 만들었는데, 대전에 비해서 정제된 글씨체이다. 전문(篆文)이라고도 부른다.
● 예서(隸書)--진시황(秦始皇) 기원전 3세기
전국시대부터 진(秦)나라의 통일기에 걸쳐 전서(篆書)의 번잡한 자획을 간략화하고, 일상적으로 쓰기에 편리하게 만든 글씨체인데, 당시 정막(程邈)이라는 자가 죄를 지어 감옥에 있을 때 십년을 연구하여 예서 삼천자를 지어 진상하였는데 진시황이 좋게 여겨 어사를 시켰다한다.
예서란 말은 秦代의 죄수를 도예(徒隸)라 하였는데 장막이 그러했으므로 예(隸)자를 따서 지었다는 설이 있다. 예서에서 파책이 없는, 곧 전서와 근접한 것을 고예(古隸)라 하고 파책이 있는 것을 팔분(八分)이라 한다. 예서의 가장 큰 특색은 가로 획의 끝을 오른쪽으로 빼는 데 있다. 이를 파세(波勢) 또는 파(波)라고 한다.
일설에는 이전부터 쓰던 한자를 정서(正書)라 하고 새로 등장한 한자를 정서에 속했다 하여 예서(隸書)로 칭한다는 견해도 있으며 부여(夫餘)의 왕문(王文)이 만들었는데 정막이 사신으로 왔다가 이를 얻어 갔다고도 하며, 여기에서 예(隸)란 노예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풍류도를 익히는 낭도의 무리를 말한다고 한다.
● 해서(楷書)--후한(後漢) 2세기
후한(後漢)의 왕차중(王次中)이 예서를 다듬어서 만든 것으로 예서체 보다 단정하고 필법이 법도가 있어 이를 정서(正書) 혹은 진서(眞書)라고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자체의 표준이 되는 글씨체이다. 일설에는 왕차중이 부여인 왕문의 먼 후손이라고 한다
● 행서(行書)
후한(後漢)때에 유덕승(劉德昇)이 만든 것으로 해서체를 약간 흘려서 모나지 않게 부드럽게 쓴 반 흘림의 글씨체를 말한다. 왕희지(王羲之)와 그의 아들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 초서(草書)
행서를 더욱 간략화하여, 이를 편리하고 빨리 쓸 수 있도록 글씨의 짜임새와 필획을 단순화 시킨 글씨체로써 곡선위주의 흘림체이다.
초서 역시 왕희지(王羲之)와 그의 아들에 의해서 극치를 이루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고서들이 초서체로 작성되었다. 후한(後漢)의 두탁(杜度)을 초서의 창안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글이나 영어의 필기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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