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자 화백의
바라보게 하는 힘
이성자 화백의 작품을 처음 확대경을 통해 가까이 접한 것은 2013년 이성자기념사업회 갤러리에서였다. 기념사업회의 의뢰로 상태 조사를 하며 화백이 남긴 수천, 수만 개의 붓자국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성자 화백의 60년대 전후 화풍이자 대표적 양식인 추상 이미지는 수많은 단세포 생명체가 생명의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듯한 이미지에 원색에 가까운 색채가 입혀져 살아 숨쉬는 맥박처럼 생동감을 주고 있다.
멀리서 보면 터질 듯한 강렬한 야성과 함께 방향성을 가진 두터운 막의 질서가 영원히 화폭 안에서 살아가도록 구속하고 있는 형상은 마치 생명이 배양되는 원시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한 걸음 이 다가서면 결국 그 거대한 생명체를 움직이는 것은 살아 있는 작은 세포임을 직감하게 된다. 잭슨 폴록이 드리핑dripping 기법을 통해 우연 속에 창조된 우주와 생명을 보여주려 했다면 이성자 화백이 창조한 우주는 무심해 보이나 철저히 계산된 창조의 과정을 보여준다.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해 정성으로 길러내는 대지와 같은 태도는 화가이자 어머니였던 화백의 이미지와도 부합한다.
일체의 언어를 침묵하게 하는 대자연의 숭고는 그 거대함을 빚은 영겁의 시간성에서 비롯되듯, 예술작품이 의식을 침잠케 하는 까닭은 작가가 창작 과정 속에 응축시켜놓은 고뇌의 시간에 있다.
수많은 붓자국이 소용돌이치거나 제자리를 부유하며 만들어낸 생명의 바다는 진화의 시간만큼이나 더디고 긴 시간을 담아내고 있다. 결코 빠르지 않게 그어진 붓자국의 여린 떨림은 화백이 작가, 여성, 어머니로서 살아간 시간을 공감의 떨림으로 전해주기에 관객은 이성자 화백의 작품을 응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수천, 수만 개의 떨림이 조응해 생겨난 질서가 만든 거대한 바닷속 생명은 바로 우리 자신을 닮아 있다. 바로 거기에서 그의 작품을 끊임없이 바라보게 하는 힘이 나온다.
김겸 / ‘시간을 복원하는 남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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