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잠을 돈으로 사는 사람들

송담(松潭) 2017. 10. 31. 22:33

 

잠을 돈으로 사는 사람들

 

 

 

 

 

 종교가 없어서인지 나는 내 사후의 일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라진 것들을 위해서,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위해서 가끔 기도합니다. 그것들을 그리워하고 후회하고 조금은 슬퍼하기도 합니다.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아이처럼 아늑한 시간들의 이불 속에서 잠을 청합니다. 강가에서 반짝이던 것이 모래알들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직도 나는 그 여름 햇빛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익사할 때까지 파란 강물을 헤엄쳐가는 꿈도 꿉니다.

 

 예수님보다 두 배나 더 살았는데도 나는 내 육신을 고집합니다. 일본에까지 왔으니 더 이상 유랑할 땅도 없습니다. 도래인들처럼 이방의 땅을 일구어낼 만한 힘도 없습니다. 아주 겸손하게 우는 새벽 새소리가 들릴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새 울까 합니다.

 

 우리가 잠자는 사이에 뼈들은 골수로부터 피를 만든다고 합니다. 몰래 그 깜깜한 밤을 틈타서 어둠이 시기하지 않도록 아침 햇살 같은 붉은 피를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럼 이렇게 잠이 오지 않는 밤이 계속되면 어떻게 피를 만드나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잠을 자지않고 꿈을 많이 꾸는 사람들은 대개 다 빈혈에 걸리는가봅니다.

 

 

수면제 스무 알 속의 밤

 

 

 처음 만난 사람의 이름처럼 외우기 힘든 드랄정

 처방전 기호는 SS520

 내 긴 겨울밤이 스무 개의 알약 안에

 밀봉되어 있다

 

 힐티는 잠 오지 않는 밤을 위해서

 글을 썼고

 의사와 약제사들은 화학기호로

 처방전을 쓴다

 

 벽시계소리가 숨소리처럼

 심장소리처럼 잠들지 않는다

 돌고래는 한 눈을 뜨고 잔다는데

 나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불침번처럼 두 눈을 뜨고 밤을 지키나

 

 새벽닭도 울지 않는 아파트 시멘트 벽

 무엇을 들으려고 귀 기울이는가

 

 드랄정 스무 개 하룻저녁에 한 알씩

 스무 날의 겨울밤이

 비닐봉지 속에서 미리 잠자고 있다

 

 잠 오지 않는 밤을 위해 힐티는 글을 쓰고

 의사와 약제사는 화학기호를 쓰고

 한 눈만 감고 잔다는 돌고래를 부러워하면서

 하품을 한다

 

 황진이의 동짓달 밤과도 같이

 긴 하품 하고 나면

 아무 의미도 없는

 차가운 눈물이 고인다

 

 

그림, 그리움, 그리고 손톱으로 긁은 글씨 

 

 벽에 걸려 있던 달력을 한국에서 보내온 미로의 그림 달력으로 바꿨습니다. 그것 하나로 방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역시 회화는 벽에 의존하지요. 벽이 없었으면 벽화는 물론이고 벽에 거는 초상화와 그 많은 그림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벽을 만들었습니다. 허허벌판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벽 속에서는 감옥이나 동굴 같아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벽에 의지하고 벽에 반발하는 앰비벌런스(ambivalence, 양면가치병존)에서 회화가 생겨나는가봅니다. 그림은 벽에 뚫어놓은 마음의 창이기 때문입니다.

 

 동양의 족자와 병풍이 모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세심한 벽을 견디지 못합니다. 공백의 격벽에 대해 절망합니다. 벽은 바람을 막고 풍경을 도살합니다. 눈을 가리고 신체를 묶습니다. 탈옥수들처럼 벽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색채와 선과 구도가 탄생합니다.

 

 에스키모인들은 얼음집에서 긴 겨울을 나기 위해 조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벽에 붙입니다. 현대회화는 벽장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전위적 비평가들은 목청을 높이고 있지만 누가 뭐래도 회화는 벽을 죽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인간정신의 산물입니다.

 

 하늘의 허공은 그림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 자체가 이미 회화요 빛이요 구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나를 가리는 벽이 있기에, 시야를 가리는 밋밋한 차폐막이 있기에 그림을 붙입니다. 붙인다기보다 뚫는 것입니다. 원시인들이 살던 동굴에서 알타미라 같은 벽화가 발견되는 것은 바로 그 동굴을 뚫어 들판의 짐승, 숲속의 사슴들에게 나아가려고 한 욕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림을 붙이는 순간 그만큼의 벽은 사라지는 것이지요.

 

 낡은 달력을 떼고 미로의 달력을 붙여놓고 나는 석기시대의 인간이 최초로 어두운 동굴에 벽화를 그려놓고 좋아했던 것처럼 그렇게 웃습니다. 그리고 그 옛날 이 땅에 잡혀와 탄광에서 젊음을 잃었던 우리 딱한 동포들의 얼굴을 생각합니다.

(! 관자놀이처럼 뛰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아오모리의 벽화

 

 그림은 긁는다에서 나온 말이다

 그림은 그리움에서 나온 말이다

 그림은 글에서 나온 말이다

 

 일본에 징용온 조선 사람이

 아오모리 탄광의 어두운 벽을

 손톱으로 긁어 글을 썼대요

 

 어무니 보고 시퍼

 고향의 그리움이

 글이 되고

 그림이 되어

 남의 땅 벽 위에 걸렸대요

 아이구 어쩌나 어무니 보고 시퍼

 맞춤법에도 맞지 않는 보고 싶다는 말

 한국말 싶어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의 언어

 배에 붙으면 먹고 싶어 배고프고

 귀에 붙으면 듣고 싶어 귀고프고

 눈에 붙으면 보고 싶어 눈고프고

 가슴에 붙으면 가슴아파 가슴아프고

 

 “마음의 붓으로 그려 바친 부처님 앞에 엎드린 이 몸은...”

 <보현십이가>의 한 이두문자처럼 해독하기도 힘든 그리움이 된대요

 옛날옛적 이 일본땅에 끌려온 조선 청년이

 탄광 벽을 손톱으로 긁어 글을 썼대요

 어무니 보고 시퍼

 

 그림은 긁는다에서 나온 말이다

 그림은 그리움에서 나온 말이다

 그림은 글에서 나온 말이다

 

 이어령 / ‘지성에서 영성으로중에서

 

 

< 참고자료 >

 

  좁은탄광에서 채광하는 조선징용인.jpg

  좁은 갱도내 엎드려 채굴하는 조선 징용인들의 모습

 

  어머니 보고싶어.jpg

 

탄광의 벽에 기록해 놓은 피맺힌 절규


 

1944년에는 국민 징용령에 의하여 강제 연행 방법으로 징용제를 시행하였다.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은 일본 각지의 탄광, 수력발전과 철도 등의 공사장, 군사 공장 등에서 참혹하게 중노동으로 혹사를 당하였다. 일제에 의해 일본으로 강제로 연행된 한국인 노무자 수는 1939∼1945년 사이에 약 113만 명에 이르렀다.  또한 일제는 1944년에 여자 정신대 근로령을 공포하고, 12∼40세의 미혼 여성들 수십만 명을 군수 공장이나 전선으로 연행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았으니 천추만대 일제의 만행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출처 : 중앙일보 J플러스

'아름다운 詩,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독한 은둔자  (0) 2017.12.02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0) 2017.11.27
마음을 따르면 된다   (0) 2017.10.24
어른일 수 없는 나  (0) 2017.10.21
이게 다 SNS 때문이다  (0) 2017.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