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송담(松潭) 2017. 11. 27. 13:53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겨울은 술 마시기 좋은 계절이 아니다. 송년회의 저 끝없는 행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0년 전쯤 내겐 혹한 따위는 우스운 얘기였다. 한겨울 밤의 칼날 같은 바람에 코트 깃을 여미면서도 술집에서 다음 술집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은 그저 신났다. 얼어붙은 눈길 위를 걸으며 친구에게 이런 고백을 했던 적도 있다. “여름엔 낮이 길어서 낮술 마시기에 좋지. 겨울엔 밤이 기니까 술을 더 오래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아.” 여름과 겨울, 열대야와 함박눈, 을지로의 맥주와 명동의 정종. 그 시절 나는 가장 가혹한 계절들마저 용서할 수 있는 박애주의자였다

 

 그러나 시간은 거의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30대 이후의 나는 겁 없이 기쁨에 취하기보다 고통을 귀찮아 하기 시작했다. 쾌락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 숙취를 견디는 것도, 추위에 떠는 것도, 빙판 위를 미끄러질 뻔한 순간도 조금 더 성가신 일이 되었다. 겨울의 술자리는 점점 드물어졌다. 친구들의 유혹을 거절한 후엔 솜이불을 고치처럼 둘러싼 채 생각했다. ‘2월까지는 절반쯤 동면 상태로 지내자.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가장 행복한 장소는 바로 여기, 나의 침대 위다.’ 틀린 얘기도 아니었다.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놓은 후 따뜻한 방 안에서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통을 천천히 먹어 치우는 겨울밤. 그보다 평화로운 시간도 드물 테니까

 

 그러나 또 한 번, 시간과 경험은 어떤 변화들을 예전으로 되돌려놓기도 한다. 궂은 날씨면 집 안으로 숨어들던 내 습성은 몇 해 전 스코틀랜드 여행에서 전환점을 맞았다. 친한 친구가 에든버러에서 결혼을 했다. 평소 좋아했던 위스키 증류소들을 돌아볼 기회였다. 몇 주에 걸쳐 계획과 동선을 고민했고, 스코틀랜드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증류소들 가운데 작은 섬들에 위치한 몇 곳을 골랐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갯내음이 난다고 표현했던 위스키들이 그 섬들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페리를 타고 섬과 섬을 이동하며, 대서양의 해풍이 불어오는 아늑한 섬에서 바다 냄새 가득한 위스키들을 실컷 즐기는 여정.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19세기적인 낭만으로 벅차올랐다.

 

 여행은 순진한 기대를 쉽게 배신한다. 기억에는 낭만과 즐거움만이 기록되는 법이지만, 낯선 지역을 헤매는 시간에는 당연히 긴장과 피로가 따른다. 두 번째 행선지로 향하는 날, 내 초조함은 절정을 맞았다. 일주일 동안 정들었던 아일라섬을 떠나야 하는 아쉬움, 한국의 3배가 넘는 식사비용, 상륙과 함께 급격하게 나빠진 날씨가 내 신경을 긁었다. 파도에 흔들리며 도착한 캠벨타운은 훌륭한 위스키 생산자들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도시 자체로만 따지자면 형편없이 쇠락한 항구에 불과했다. 스코틀랜드의 늦가을은 추웠다.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뼛속까지 스몄고, 몸을 웅크린 채 인적 드문 마을을 종일 걸어야 했다. 해가 저물 즈음 나는 울적하고 퉁명스러운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악천후의 시골 연안, 하루치의 한기를 녹여준 것은 작은 호텔 바였다. 아드셔 호텔은 바다를 등지고 선 유서 깊은 호텔이었는데, 1층의 바가 위스키 애호가들에게 유명하다고 했다. 홀딱 젖은 생쥐 같았던 내게 그곳은 술집이라기보다 난파선을 인도하는 등대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몸을 녹이기 위해 술을 주문했다. 캠벨타운에서 생산되는 스프링뱅크 10년과 스코틀랜드식 순대 요리인 해기스, 훈제 홍합이 함께 나왔다. 짜고 기름진 음식들로 텅 빈 위장을 채우자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목구멍 뒤로 넘어가는 알코올의 감촉은 따뜻했고, 독주의 취기가 온몸에 기분 좋게 회전했다. , 그렇군. 그래서 날씨가 궂은 지역에서 그렇게들 술을 마시나봐. 햇빛 한 조각 보지 못했던 우울한 하루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한잔의 술이 이렇게 맛있을까? 술의 풍미를 따지지 않더라도, 그만큼 달콤한 한잔이었다

 

 시간이 좀처럼 바꿔놓지 못하는 것도 있다. 내가 술을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 또한 그중 하나다. 예전처럼 자주 마시진 않는다 해도, 캠벨타운에서의 위스키 한잔은 겨울의 음주가 지닌 미덕을 다시 일깨웠다. 쾌락의 후유증은 괴로움을 동반하지만, 때로 괴로움을 겪은 후에야 쾌락의 가치를 깨닫기도 한다. 어느 정도의 고난, 그것도 육체적 고난은 술을 더욱 향기롭게 한다. 여름 밤거리에서 방만하게 마시는 맥주도 좋지만, 추위에 긴장했던 몸을 느긋이 데우는 겨울의 술만큼 좋은 것도 드물다.

 

 기형도는 램프와 빵이라는 제목으로 짧은 시를 썼다.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 제목에 이라는 한 글자를 덧붙여본다. 수은주가 영하로 치닫는 겨울밤, 도시 곳곳의 술집들이 등대처럼, 난로처럼 내 마음을 부를 것이다.

 

 정미환 / 오디너리 매거진 부편집장

 (2017.11.25 경향신문)

 

정미환 오디너리 매거진 부편집장

 

 

'아름다운 詩,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홀로 겨울 산사(山寺)에서.......  (0) 2017.12.21
고독한 은둔자  (0) 2017.12.02
잠을 돈으로 사는 사람들  (0) 2017.10.31
마음을 따르면 된다   (0) 2017.10.24
어른일 수 없는 나  (0) 2017.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