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일 수 없는 나
가뭄에 반가운 비 오는 날의 새벽이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유난히도 요란한 것을 보니 모내기 철이 다가온 것이다. 예전 같으면 새벽녘 닭 울음소리와 함께 이웃 어느 집에선가 밤낮이 뒤바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릴 법한데 우리 마을에서는, 아니 대부분의 농촌 마을에서는 그친 지 오래다.
그뿐만이 아니다 해마다 연세 많은 어르신들의 부지런한 모습 또한 점차 줄어가는 농촌이 안타깝기만 하다. 복잡하고 사건 사고가 많은 곳, 거기다 생존경쟁을 위해 치열하게 바빠야만 하는 도시 생활이 싫었다. 더욱이 부모를 노인요양시설에 보내는 것은 큰 불효라 믿고 계시는 부모님을 모셔야 하겠기에 의무감보다는 자식의 도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7년 전 정년퇴직을 했다. 40여 년의 서울 생활도 청산했다. 아내와 형제들이 반대했지만 낙향을 결심했다. 정년 2년을 앞둔 가을, 내가 태어난 곳에서 가까운 곳이자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가 아름다운 국립공원 자락에다 텃밭이 딸린 작은 집터를 마련했다. 은퇴 후1년, 시골 태생이면 누구나 한 번쯤 살고자 동경했을 법한 작은 한옥 한 채를 지었다. 오래도록 묵혀 폐허처럼 변해버린 땅, 우거진 풀을 뽑고 다듬어 정원과 연못도 만들고 심고, 씨 뿌리는 일들로 이른 시간부터 늦은 시간까지 바빴다.
내년이면 내 나이 일흔 살이 된다. 그러나 나는 어른일 수 없다. 10년 전 갑자기 파킨슨병을 얻어 급박뇨까지 있어 돔봄이 필요한 올해 96세 되신 아버지와 허리가 많이 굽고. 관절 마디마디 통증이 심하고, 거기다 가끔 원인을 알 수 없는 배앓이로 당황케 하시는 어머니를 사시던 아파트에서 모셔왔다. 두 분을 보살펴야 하는 일과, 월 1회 정기진료를 받고 처방을 받아 약을 챙겨드려야 하는 일 역시 빠뜨릴 수 없는 나의 일과가 되었다.
늙어 나이가 들면 어린아이가 된다 했던가.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고집을 부리기도 하고 지인들이 오거나 우울감이 들 때면 역시 어린아이처럼 울기도 한다. 낮에는 잠을 많이 주무시고 밤에는 환청이나 환상으로 심할 때는 큰 소리로 혼자 대화를 하시면서 잠을 못 이루신다. 잠을 설쳐가며 보살펴야 하기에 요양보호사 역할을 해야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요즈음 우리 세대를 일컬어 속칭 ‘마처 세대’라고 한다. 효도를 하는 마직막 세대이자 효도를 기대할 수 없는 처음 세대인 것이다. 노인 돌보기는 이제 농경사회의 대가족제도에서나 가능한 일이요, 오늘날 산업사회의 핵가족제도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됐다.
부모 모시는 일 가운데 가장 불편한 점 중의 하나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출타가 자유롭지 못해 절친한 친구나 지인과의 만남을 포기해아 함으로써 즐거움의 기회를 많이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스트레스를 받는 때가 많다. 즐거운 마음으로 보살피겠다고 매일 다짐하면서도 이상행동을 할 때는 인지능력이 상실되어 그리한다는 사실을 순간 망각하여 짜증을 내기도 한다.
십계명 중 제5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했다. < 효경(孝經)>의 5형장(五刑章)에도 죄악 가운 데 가상 무거운 죄가 불효라 했다. 쉽지 않은 어려운 일이기에 지키라 했을 것이다. 부모님의 뜻을 잘 살펴 불편해하는 것이 무엇이고, 윈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헤아려 편하게 해드려야 참된 효일진대 그렇지 못하는 때가 많다.
420평의 그리 크지 않은 텃밭에 연간 30여종의 작물을 가꾸다 보면 하루가 지루하지 않아 좋다. 잡초 관리와 병해충 방제 작업이 때로는 힘들기도 하지만 아직껏 제초제 사용을 하지 않는다. 병해충 방제 역시 최소한의 농약 사용만을 고집하고 있다. 힘이 들고 거둘 것이 적긴 하지만 다행히 연금수급자라서 팔아 얻는 수입에 연연하지 않아 만족한다. 한적하고 아직은 정이 많은 이들이 남아 있는 곳, 작디작은 씨가 자라서 수백 배의 결실로 보답하는 기쁨은, 힘든 일이 상쇄되고도 남는 낙이다. 남들보다 적게 거둔 곡식이지만 그래도 남아서 이웃과 형제, 친척들에게 나누는 기쁨 또한 보람이기도 하다.
농번기에는 일손이 많이 필요한 못자리 설치 작업이나 모내기 작업, 양파 수확 등 일손이 아쉬운 이웃을 위해 짬을 내어 자원봉사를 한다. 아니, 종내에는 품팔이 봉사가 되는 셈이다. 추수 때가 되면 잊지 않고 나에게 없는 필요한 먹거리들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겨울철 농한기에는 귀촌한 이웃들과 부안마실길과 곰소염전둘레길을 매일 걸으면서 건강을 다지고, 친목을 도모한다. 전원생활이 어렵고 힘들며 불편함이 없지는 않지만 기르고 모이 주지 않아도 철따라 찾아와주는 갖가지 새와 동물, 벌과 나비가 친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밉기도 하다. 씨 뿌려 가꾸지 않아도 피어나는 야생화가 아름답다. 새벽 미명에 동창으로 비쳐드는 아침 햇살의 포근함은 극세사 이불보다 포근하고, 석양에 낙조가 그려내는 거대한 그림은 어느 뛰어난 화가의 솜씨 보다 낫다.
부모님의 남은 생이 얼마일지는 알 수 없지만 편안하게 모실 수 있도록 어른이 아닌 언제까지나 건강한 아들이었으면 좋겠다.
임성규 / 전 서울 중구청, 제16회 연금수필문학상 동상
‘공무원연금 2017.10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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