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의 사회적 역할
어린이와 수녀와 정치인이 한강에 빠졌을 때 누구를 먼저 구해야 하는가? 오래전에 유행했던 수수께끼 중 하나이다. 답은 정치인이다. 보통 상식으로는 어린이와 여성처럼 약한 사람을 먼저 구할 텐데 어째서 정치인부터 구해야 하는 걸까? 이유는 한강은 수많은 사람의 식수원인데 정치인이 한강에 빠지면 수질오염이 너무 심해져서 다수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주기 때문이란다. 우스갯소리로 나온 말이겠지만 정치인에 대한 어떤 엄숙한 비판보다도 사람들의 속을 후련하게 하는 이야기다.
또한 정치적인 압제가 극심해서 저항이 어려울 때 웃음을 매개한 풍자는 훌륭한 무기 역할을 한다. 웃음은 신이든 권력이든 두려움의 대상을 희극적인 대상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사람들의 내면으로부터 저항의 가능성을 확산시킨다. 즉 괴물은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고 싸울 수 있는 대상으로 격하된다. 그런 의미에서 웃음은 권위와 두려움에서의 일시적인 탈출이 아니라 저항과 해방이라는 기능을 담당한다.
그래서 중세 기독교 교회는 웃음이나 희극적인 요소를 담는 연극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대신 엄숙함, 참회, 슬픔의 감정만을 기독교인들에게 강요했다. 조선시대의 유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교에서는 마음을 진지하게 가져야 성현의 도리를 실행할 수 있다고 하면서 웃음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군자는 기쁨과 즐거움, 욕망과 같은 감정이나 우스갯소리 따위는 멀리하고 모름지기 수양을 통해 엄정한 마음가짐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일종의 웃음 금지령이다. 웃음의 금지와 엄숙함의 강제는 사회적인 제한과 금기를 유지하는 권위주의의 주요 수단이었다.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이데올로기를 담당했다.
압제자가 강제하는 엄숙함의 그물을 뚫고 웃음이 터져 나올 때 희망은 숨통이 열린다. 그 웃음을 타고 저항의 심리적인 조건이 조금씩 성장하면서 자리를 잡아간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웃음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TV를 비롯한 거대한 상업적 대중매체에 의해서 만들어진 웃음은 과거에 풍자극이나 풍자소설이 했던 비판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개그의 홍수 속에서 웃음 뒤의 통쾌함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웃음은 있지만 저항으로서 웃음은 사라져 버렸다. 웃기는 것 자체가 목적인 웃음이 판을 친다. 오히려 사회적인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순수한 웃음’을 자랑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현실의 개그처럼 비사회적인 ‘순수한’ 웃음이야말로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노골적으로 사회적 역할을 한다. 문제는 사회적 역할이 과거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신변잡기식이나 말장난식의 웃음으로 사람들을 억압적인 현실에 묶어두는 역할, 저항을 봉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시대의 진정한 웃음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박홍순 / ‘미술관 옆 인문학’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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