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사랑하라
니힐리즘(nihilism)은 라틴어 니힐(nihil)에서 왔다. 니힐은 허무라는 뜻이니, 니힐리즘은 허무주의라고 옮길 수 있겠다. 1800년대 니힐리즘은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상으로 통했다. 왜 그랬을까? 종교나 도덕은 사회의 뿌리를 이룬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잣대를 사람들에게 일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힐리스트들은 사회를 지탱하는 믿음들에 코웃음을 쳤다.
기독교 성경의 가르침이 옳다는 근거는 어디 있는가? 왜 우리는 황제에게 충성해야 하는가? 왜 사람들은 귀족과 평민으로 나뉘어야 하는가? 꼼꼼히 따져 보면 이 모두가 근거 없는 믿음일 뿐이지 않는가? 우리가 믿고 따르던 모든 질서와 가치는 근거가 없다. 따라서 허무하다. 니힐리스트들은 사회를 뿌리부터 흔드는 혁명가로 여겨졌다.
니체(1844~1900)는 니힐리즘을 철학적으로 정리해 보여준다. 현실은 늘 변화하고 미래는 불안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국처럼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내세’를 만들어 냈다. 우리는 영원한 진리와 죽음 이후의 참된 삶을 좇아야 한다. 현실의 삶은 이를 좇는 과정일 뿐이다. 유럽 사회는 이렇듯 헛된 이상을 세워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더 허무해진다. 우리의 삶은 내세와 진리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현실의 욕심을 다스리며 영원한 진리를 좇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금욕주의가 삶의 올바른 방식으로 자리 잡는다. 이렇게 이상과 내세를 좇는 사상과 종교는 우리의 삶을 허무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상과 종교가 앞세우는 이상과 내세가 진짜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단지 헛된 상상일 뿐이지 않을까? 니체는 날카롭게 따져 묻는다. 금욕주의와 종교에 따라 일상의 삶을 억누를 때, 우리는 더 행복해졌던가? 되레 더 시들해지고 우울해지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제 종교는 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다. 유럽의 뿌리를 이루던 기독교 신앙이 일상을 허무하고 가치 없게 한다면, 신에 대한 믿음은 사라져 버려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삶이 건강하게 피어날 테다.
니체는 ‘망치로 철학하는 것처럼’ 사회에 뿌리내린 도덕을 부수어 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윤리를 세우려 한다. 니체에 따르면 기독교 초기 신자들은 로마 시대의 노예들이다. 노예들은 주인을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도덕적으로 주인을 길들이려 했단다. 무슨 말일까? 노예는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 늘 복종하고 인내하고 겸손해야 한다. 기독교는 이런 태도를 바람직하다며 치켜세운다. 노예들은 비록 주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지만, 이 때문에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주인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자 ‘노예의 도덕’은 주인들까지도 철저히 옥죄게 했다. 주인도 ‘겸손과 순종’의 미덕에 따라 눈치를 보며 자신을 낮추고 욕구를 다스리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노예의 자세가 귀족과 자유인에게까지 퍼진 모양새다.
니체는 노예의 도덕이 우리의 삶을 억누르고 있는 현실에 분노한다. 우리의 삶은 생동하는 에너지로 가득하다. 욕구와 욕망을 따른 삶, 자신의 우수성을 한껏 드러내고 펼치려는 마음은 건강하다. 니체는 이를 ‘힘을 향한 의지’라고 한다. 내세, 영원한 진리 등을 내세우며 삶을 짓누르는 도덕은 옳지 못하다. 우리 안에는 더욱 강하고 멋지며 아름답고 우수해지려는 욕구가 가득하다. 힘을 향한 의지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죽어 사라질 운명이다. 니체는 이러한 인생의 허무함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라고 권한다. ‘영원회귀’, 우리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 삶은 죽은 후에도 영원히 거듭될 운명이다. 지금 실수와 후회가 가득한 일을 했다고 해 보자. 그러면 앞으로 나는 똑같은 잘못을 영원히 반복하며 회한을 거듭하게 될 테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나는 제대로 결단을 내려 올곧은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영원히 삶이 반복될수록, 나는 더욱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 그럴 때 나는 내 인생을 튼실하게 누리며 참되게 세울 것이다. 니체가 거듭 강조하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니힐리즘은 뜻하는 바가 무척 넓다. 인생무상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불교도 니힐리즘으로 볼 수 있다. 모든 게 무의미하다고 여겨졌을 때, 사람들의 태도는 둘로 갈린다. 어떤 이들은 내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 무언가에 절실히 매달린다. 신과 종교, 부와 명예 등등 삶을 채워 줄 무엇에 정신을 쏟는다. 허무함을 쫓기 위해 더 허무한 무엇에 매달리는 식이다. 이런 모습은 현실을 잊기 위해 약물에 매달리는 마약 중독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와는 반대로 오히려 삶이 무의미하다는 현실에서 희망을 찾는 이들도 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이 되어야 할지에 대한 정답이 없다면 나는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펼치고 싶게 마련이다. 그런데 허무주의에 따르면 그 무엇도 나를 옥죄지 못한다. 모든 것은 결국 헛되며 세월 앞에 스러질 뿐이지 않던가. 나는 내 안에 강렬한 에너지를 원하는 대로 펼치며 내 삶을 가치 있게 꾸밀 수 있다. 긍정의 니힐리즘은 이렇듯 허무에서 삶에 대한 강렬한 애정을 뿜어 올린다.
니체는 우리에게 ‘초인’이 되라고 외친다. 초인이란 삶을 긍정하며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실현하려는 사람이다. 긍정의 니힐리즘은 우리 안의 위대해지고 싶은 욕망을 일깨운다. 날로 치열해지는 생존경쟁은 우리를 주눅 들게 한다. 긍정의 니힐리즘은 점점 초라해져 가는 우리의 영혼에 힘을 주는 치료제가 아닐까.
안광복 / ‘교과서에서 만나는 사상’중에서 발췌정리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식론/존재론 (0) | 2014.02.14 |
---|---|
시시포스의 형벌 (0) | 2014.01.23 |
자아이상이 강한 사람, 초자아가 강한 사람 (0) | 2013.09.09 |
여백 (0) | 2013.08.15 |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생물학적인 이유가 있다 (0) | 2013.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