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여백

송담(松潭) 2013. 8. 15. 17:10

 

 

여백

 

 

 

 한 미술애호가가 유명 작품 전시회를 방문합니다. 예술적 정열이 가득한 명화들과 해박하고 맛깔스러운 큐레이터의 해설이 어우러지며 그의 안목은 한층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봄날의 들국화처럼 피어날 때쯤, 맞은편에 걸려 있는 한 대형 그림이 그의 시야로 들어옵니다. 양 옆으로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유명 화가의 초상화가 결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작품이 이 미술관의 오늘을 만들어 준 대표작으로 보입니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가까이 다가섭니다. 그런데 자세히 그림을 감상하려던 방문객의 얼굴에 당황함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림이 거물급인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 그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안에는 하얀 종이만이 값비싸 보이는 그림틀을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상황인가요? 이 중요한 공간에 백지라니요? 그리고 모처럼 겨우 찾은 시간을 백지를 들여다보는데 써야 한다니요? 갑자기 짜증이 밀려옵니다. 큐레이터에게 물어보고 싶어도, 행여 자신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 투명한 비밀이 감춰져있을 것 같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혹시 그 안에 들어 있는 백지가 우주에서 날아온 신비한 물질인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종이를 만드는 과정에서 값비싼 다이아몬드 가루를 첨가한 것인가요? 궁금증은 이내 저절로 풀립니다. 그의 눈에 작품의 제목이 들어온 것입니다. 무엇이었을까요?

 

 

품명 : 여백

작가 : 실존

제작년도 : 시간

 

 

 작품의 제목은 여백이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이 작품이 왜 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공간에 걸려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완성품으로 세상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이것과 저것으로 정의될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실존이 곧 여백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만의 힘으로 그 여백을 그리기도 하고 때론 지우기도 합니다. 그리곤 자연의 색으로 한껏 멋을 내기도 합니다.

 

 무엇을 그렸고 무엇을 지웠는지가 개인이 누구인지 보여 주는 삶의 이야기가 됩니다. 철학의 힘은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정신의 힘입니다. 개인의 삶의 이야기조차 또 하나의 스펙으로 만들어버린 현대사회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의 지평이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가 워낙 독특하고 이상한 나라의 경험들로 채워져 있기에 그 작품을 이해하려면, 작가의 설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설명들을 모아 놓은 책이 바로 철학사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훌륭한 철학사는 각자가 만들어가는 삶일 것입니다.

 

 먹고 살기도 버거운 시대입니다. 여백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 정신적 사치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겐 더욱 여백이 필요합니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김종엽 / ‘철학특강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