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자아이상이 강한 사람, 초자아가 강한 사람

송담(松潭) 2013. 9. 9. 22:27

 

 

자아이상이 강한 사람, 초자아가 강한 사람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세계를 설명하면서 그 구조적 본질로 이드Id와 자아Ego 그리고 초자아Superego라는 세 개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드란 영어의 ‘it’에 해당하는 말로 자아를 점령하고 있는 무의식을 의미한다. 자아란 자신의 욕망대로 움직이려는 원초적 욕구의 덩어리이며, 초자아란 어린아이가 현실의 의의를 깨달아가면서 생성된 자기 보호적 욕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드 속에서 자아는 현실을 떠나서 자신의 기쁨만을 향한 무의식적 욕구의 실체이며, 초자아는 현실의 규범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아를 현실의 원리에 맞도록 억제하려는 무의식적 욕구가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위 세 개념 외에 훗날 자아이상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추가한다.

 

 프랑스 여류 정신분석학자인 샤스귀에르 스미젤로부터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아이상이란 원초적인 자아도취의 완전성으로 회귀하려는 무의식적 욕구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초자아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치면서 현실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될 때 이를 따르려는 무의식적 욕구로 해석한다. 어린아이는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는 현실의 고통을 잘 모른다. 이러한 상태를 소위 원초적 자아도취의 완전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한 번 경험한 기쁨을 다시 찾으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일생을 통해 지속적으로 어머니 배 속에서 경험한 자아도취적 완전성을 추구하게 된다.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어머니 자궁 속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따라서 샤스귀에르 스미젤은 자아이상이야말로 원초적 자기도취의 완전성을 찾으려는 기쁨의 원리에 근거한 욕구라고 규정하고 있다.

 

 어린아이는 막 태어났을 때 어머니와 자신을 분리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6~7세가 되면서 어머니 사랑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인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이 최초의 현실적 의미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우리도 잘 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샤스귀에스 스미젤은 초자아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치면서 싹트게 되는 현실의 원리Reality Principle”를 따르려는 욕망으로 본 것이다. 초자아에 대한 개념은 프로이트도 이와 같이 설명했다. 이는 초자아란 자아이상을 억제하는 욕구로 볼 수 있기에 나는 초자아라는 의미를 자아이상의 대칭개념으로서 좀 더 명백히 규정하기 위해 자아억제라고 표현하곤 한다.

 

 치유를 이야기하며 내가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자아이상과 초자아이다. 인간의 모든 감성적 갈등과 고통, 그리고 슬픔 등은 자아이상과 초자아라는 양대 욕구의 불균형 혹은 심한 갈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아이상은 이드 속에 존재하는 자아, 현실을 무시하고 기쁨만을 추구하려는 무의식적 욕구이다. 반면 초자아는 자아를 현실의 원리에 맞도록 억제하려는 무의식적 욕구이다.

 

 예를 들어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서 가수의 꿈을 가진 이가 현실적인 이유로 보험회사에 취직했다고 생각하자. 이 때 자아이상은 어서 빨리 직장을 그만두고 가수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자아이상의 욕구이다. 반면 초자아는 현실을 직시하라며 직장에 충실할 것을 조언한다. 이것이 바로 초자아의 욕구이다.

 

 우리들 중에서는 자아이상이 강한 사람은 비현실적인 혹은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한다. 어느 면으로는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성에 대해서 비판적 태도를 보이기가 쉽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나 선생님의 말을 거역하는 경우도 있다. 한마디로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반면 초자아가 강한 사람은 현실적인 법과 도덕 혹은 규범을 잘 지킨다. 지각도 하지 않고 결석은 더더욱 하기를 꺼려한다. 친구들과 빗나간 행동은 상상도 못한다. 법이 없어도 문제가 없을 사람 같다. 그러니 현실에 매우 잘 순응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있어도 현실적으로 이를 즉각 실행에 옮기는 것을 두려워한다.

 

 실로 모든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매순간 자아이상과 초자아의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자아이상이 이길 경우도 있고 초자아가 자아이상을 억제할 때도 있다. 우리가 흔히 정상적이라고 보는 정신 상태는 이러한 자아이상과 초자아가 적절히 타협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자아이상이 점진적인 길을 택하는 경우인 것이다. 그런데 자아이상이 항상 초자아의 억제를 뿌리치고 이길 경우는 비현실적인 행동을 보이기 쉽다. 예를 들어 변신한 애인을 찾아가 행패를 부리고, 모든 일이 뜻대로 안 될 경우 자기의 이상에 집착을 보여 현실에서 용납될 수 없는 범죄적 행위도 서슴치 않는다. 이는 한마디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 추진하는 데 현실적인 요소를 고려치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자아이상이 강한 사람이 항상 퇴행적이고 초자아가 강한 사람이 항상 긍정적이며 모범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초자아가 시키는 대로 주어진 현실의 논리에만 충실하거나, 자아이상이 초자아와 타협만을 한다면 이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아이상이 초자아의 억제를 벗어나더라도 인간을 행복하게 이끌어간다는 문명의 근본정신에 부합되는 창조성을 발휘한다면 이는 결코 퇴행적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학문이나 예술, 혹은 정치에서 자아이상을 통한 긍정적인 현실의 변화 혹은 창조적 업적을 수없이 경험하고 있다. 즉 학문이나 예술적으로 당시 현실에서는 용납되지 않았던 이론이나 시도가 후일 새로운 의미로 인정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따라서 자아이상이 원초적인 자아도취의 완전성으로 돌아가려는 욕구인 이상, 이는 우리의 소망, , 그리고 기대 등으로 발전하여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힘을 가질 수 있다.

 

 또 한 가지 첨가하자면 자아이상은 초자아를 완전히 삼켜버릴 수 있지만, 초자아는 자아이상을 완전히 제압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자아이상이야말로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이며, 초자아는 자라나면서 후천적으로 현실의 원리를 알아갈 때 생성되는 욕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새로운 현실을 꿈꾼다. 그러나 주어진 현실의 규제도 벗어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초자아의 욕구란 현실을 살아가려는 계산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원초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김용신/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인문학 카페 인생강의중에서 발췌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시포스의 형벌  (0) 2014.01.23
운명을 사랑하라  (0) 2013.12.22
여백  (0) 2013.08.15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생물학적인 이유가 있다  (0) 2013.08.12
의미로 살아가는 존재  (0) 2013.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