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남녀 사이에 에로틱한 우정은 가능할까. 사랑만으로도 벅차고 우정만으로도 소중한데, 사랑과 우정의 장점을 모두 한입에 털어 넣으려 하다니. 사랑하면서도 구속하지 않는, 죽마고우처럼 신의를 지키는 에로틱한 우정. 그것은 어쩌면 아무런 수식어가 필요 없는 사랑에 순수하게 올인 할 수 없는 현대인들이 상상해낸 ‘편리하고 효율적인 사랑’의 판타지인지도 모른다. 에로틱한 우정을 빙자하여 카사노바도 울고 갈 엄청난 바람기를 정당화하는 대표적인 캐릭터, 그가 바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인공 토마시다.
에로틱한 우정은, 결혼하고도 계속 버젓이 연애하고 싶은 남자들의 앙큼한 상상력을 응축한 지극히 이기적인 발명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밀란 쿤데라의 명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매우 철학적인 화두이기도 하다.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 중 한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그 무거움과 가벼움의 장점 모두를 향유하고픈 인간의 근원적인 화두, 그것이 바로 에로틱한 우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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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한 우정은 분명 이기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에로틱한 ‘우정’에 방점을 찍는다면, ‘에로틱’이라는 말에 지나친 과민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남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긴장감이 바로 에로틱한 우정이 아닐까. 누군가를 에로틱하게 느끼는 것은 타인의 매력을 전폭적으로 인정하는 태도에서 우러나오기에 서로를 우울증에서 해방시켜줄 것이고, 에로틱함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일상을 구속하지 않는 담담한 우정이기에 서로의 존재를 ‘무거움’의 쇠사슬로 결박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타인의 에로틱함을 발견하고 존중하는 것은 굳이 연인이나 부부사이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는 부부사이에도, 동료사이에도, 처음 만나는 갑남을녀 사이에도 이렇게 서로의 가치를 존중해주는 에로틱한 우정이 건강하게 흘러넘치기를 바란다. 사람은, 삶은, 사랑은, 가벼움만으로도 무거움만으로 지탱되지 않는다.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참을 수밖에 없는 삶의 무거움’ 사이에서 영원히 흔들리며, 그 가벼운 무거움을, 그 무거운 가벼움을 생의 끝까지 함께해줄 사랑과 우정을 찾는다.
정여울 / ‘잘 있지 말아요’중에서
< 2 >
많은 사람들은 ‘계(戒)’를 지키기 위해 ‘색(色)’을 포기한다. 계율의 그물망을 뚫고 욕망을 택한 사람들은, 욕망의 대가를 철저히 치러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계율의 물샐 틈 없는 수비를 뚫고, 기어이 자기만의 ‘색’을 이루어낸다. 그 ‘색’이 사랑일 수도, 신념일 수도, 공동체일 수도 있다. 계율이 가로막는 모든 금지된 길들 위에 인간의 ‘색’이 꿈꾸는 피 묻은 이정표가 세워진다.
< 3 >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사랑에 관해서는 좀처럼 쉽게 지혜로워지지 않는 것 같다.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여전히 늙지 않은 싱그러운 영혼을 지녔다는 멋진 증거이기도 하다. 멋진 사랑은 있지만 올바른 사랑은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정답 없는 사랑의 방정식을 풀기 위해 저마다 오늘도 고군분투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본능이기에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한다. 남녀는 영원한 평행선처럼 서로의 내면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서로를 버릴 수 없다. 사랑은 ‘필요’에서 출발하기보다는 ‘멈출 수 없는 열정, 불가피한 매혹’으로 시작된다. 사랑이 ‘필요’에 그친다면 많은 사람들은 사랑 자체를 절제할 수 있을 것이다.
< 4 >
아픔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아픔을 추구하는 것. 고통이 마치 사랑의 의무이기라도 한 듯 고통을 적극적으로 견디는 것. 그 또한 낭만적 사랑에 빠진 이들의 주된 특기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일종의 자발적 최면 상태에 빠져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과 마주치곤 한다. 평소에는 ‘유치하다. 촌스럽다. 멍청하다’라고 믿었던 모든 행동들을, 사랑에 빠졌을 때는 거리낌 없이, 오히려 더욱 큰 기쁨으로 해낼 수 있다. ‘사랑에 눈멀다’라는 표현은 바로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아름다운 혹은 파괴적인 맹목을 표현하는 만국공통어다.
정여울 / ‘잘 있지 말아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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