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취향의 지표, 구별의 지표

송담(松潭) 2012. 2. 3. 16:37

 

 

취향의 지표, 구별의 지표

 

 

 

 이제 한국 사회에서 와인은 모임의 성격을 결정짓고, 참석자의 수준을 결정짓는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결혼식과 각종 행사에서 맥주나 소주가 아니라 와인으로 건배한다. 어떤 와인이 놓여 있는가가 모임의 수준을 결정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제 와인은 세련된 소비문화로 완전히 정착했을 뿐 아니라 문화적 권력이 되었다.

 

 술 자체가 아니라 이 술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허상을 사랑하게 된 과정은 질문과 답이 필요한 복잡한 문제다. 섬세하게 맛을 판별하고 좋은 술을 찾아내는 심미안과는 관계없는, 오로지 고급의 취향을 표현하기 위한 수사들을 사랑하고 그 수사들로 남들과 달라지고 싶어하는 이 욕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질료 위에 수사(修辭)가 얹힌다. 즉물적인 구체의 세계에, 만지고 느껴지는 물질적 세계 위에서 온갖 화려한 말의 잔치가 벌어진다. 그리고 이 말의 성찬이 자본이 되고 권력이 된다. 와인만이 아니다. 온갖 명품 시계와 가방, 고급 수입차, 고가의 아파트, 초호화 리조트가 모두 그러하다. 우리 사회에서 와인이 하나의 문화 권력으로 자리잡는 과정은 하나의 명품이 만들어지고 거대한 힘을 갖게 되는 과정과 그대로 겹친다.

 

 포도로 만든 술, 악어가죽으로 만들어진 가방,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시계 위에 언어적 수사가 얹히면 그것은 돈으로 환산 가능한 사회적 기호가 된다. 자본은 즉물적인 질료가 아니라 오로지 그 위에 얹힌 기호에서 상품성을 본다. 가죽 백이 아니라 가죽 백에 새겨진 명품의 로고가 상품성을 가진다. 이처럼 기호가 자본과 결합하면 하나의 코드가 되고 더 나아가 문화적 자본이 된다. 그에 따라 이 상품들은 문화적 소비재로서, 물질을 넘어 사회적 의미망 안에서 새롭게 유통된다.

 

 우리 사회에서 소비는 상품의 유용성이나 기능 등 사용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자신을 사회적으로 드러내고 인정받기 위한 차별화의 욕구를 표현한다. 이들이 경제력을 과시하기 위해 돈을 쓰고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행위의 근본적인 목표는 사회적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사회적 관계는 서로 연대하고 공존하는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다름우월함을 목표로 하는 왜곡된 관계다. 나를 어떻게 표현하고 이미지화하는가에 따라 얻게 되는 사회적 위상이 소비행위의 진정한 목표라 할 수 있다. 좀 더 비싼 것, 좀 더 알려진 것, 좀 더 남들이 가지기 어려운 것을 추구하는 심리는 남들과 구별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명품들로 인해 권위와 자긍심이 발생한다는 것은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그 사람의 안이 텅 비었다는 뜻이다. 내부가 텅 비어 공허하기 때문에, 스스로 가치를 만들 자신이 없기 때문에 이미 사회가 승인해서 권력이 생긴 상품들을 구매하고, 그 상품의 이미지로 주변과의 관계를 채워가려 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돌아간다. 텅 빈 곳에 텅 빈 이미지를 채운들 어떤 충만이 있을까. 텅 빈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관계가 어떻게 단단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남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가장 초급의 단계는 상품 위에 얹힌 수사에 귀 기울이지 않으려는 무관심일 것이다. 남의 말이나 평가, 불필요한 수사에 냉정하고 남이 가진 것과 비교하지 않는 것. 그 다음은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의 경험을 믿는 것. 결정적으로 텅 빈 이미지로 내 안을 채우려 하지 않는 것.

 

 

김선희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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