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그림자

송담(松潭) 2012. 5. 10. 16:07

 

그림자

 

 

 

 몸 안에서 비어져 나온 그림자가 발치 아래 잘팍 엎질러져 있다. 발목에 휘감긴 채 언틀먼틀 눌러 붙은 그림자를 멈추어 서서 오래 바라본다. 안녕? 친구...... 빛깔도 향기도 없는, 눈도 코도 없는 익명의 정령에게 얼쯤하게 인사를 건넨다. 도시 복판을 막막하게 서성거릴 때, 떠나온 곳도 가야할 곳도 잃어버리고 신의 행방마저 묘연하던 그때에도 그림자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전봇대보다 큰 키로 서서 성큼성큼 나를 안내해 주었다.

 

 오늘은 내가 그림자를 호위한다. 그림자는 수평으로 땅 위를 순찰하고 나는 수직으로 햇살을 막아선다. 그림자는 나를 거느리고 나는 그림자를 보필한다. 그림자가 대장, 나는 졸개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 그리고 그림자로 되어 있다. ‘빛의 직진성으로 인해 통과할 수 없는 물체에 막혀 생기는 어두운 부분이라는 그림자의 정의는 그러므로 틀렸다. 게릴라처럼 몸 안으로 침투해 온 광선에 의해 광포하게 유린되어 몸 밖으로 쫓겨난, 그림자는 유민이다. 내안의 어둠, 내 존재의 그늘이다.

 

 몸에서 추방당한 그림자들이 대기 중에 떠도는 빛의 입자를 잡아먹는다. 햇살이 그늘에 빨려들고 어둠이 성큼 일어나 걷는다. 어디선가 밤이 출력된다. 그림자들은 서둘러 몸 안으로 복귀한다. 내 키보다 곱절이나 큰 어스름이 어떻게 몸 안으로 저를 구겨 넣는지 아직도 나는 알지 못한다.

 

 어둠 속에서, 도시는 다시 형형색색 피어난다. 쏟아지는 불빛을 감당 못하고 쉴 곳을 찾지 못한 그림자들이 떼 지어 거리를 쏘다니며 봉기한다. 산더미 같은 어둠으로도 알전구의 불빛 하나 박멸하지 못하는 밤, 복무기간이 길어진 그림자가 지르퉁하게 푸념을 뱉는다.

어둠으로 빛을 가릴 수 없어, 빛은 빛으로, 더 밝은 빛으로 밖에 가릴 수가 없는 법이거든....”

 

 

최민자 / ‘손바닥 수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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