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린 ‘염려사회’에 살고 있다
TV를 틀면 유명 원로 연예인의 익숙한 목소리가 자주 들린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에서 보험을 들기가 만만치 않은 노년층을 상대로 보험에 가입하도록 유혹하는 광고의 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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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염려를 조장하고 그 염려를 보험으로 완화시키라는 자본의 유혹이 무섭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돌아보자. 과연 노인들만 미래를 염려하고 있는가? 초등학생에서부터 중학생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은 특목고나 자사고에 갈 수 있을지를 염려하고, 고등학생들은 명문대에 갈 수 있을지 염려하고 있으며, 대학생들은 취업을 할 수 있을지를 염려하고 있다. 심지어 직장인들은 실직이나 당하지 않을지, 혹은 너무 이른 은퇴 뒤의 삶이 어떨지 염려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온통 미래에 대한 염려로 가득한 사회, 즉 염려사회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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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미래를 지나치게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은 잡을 수 없는 파랑새와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행복을 약속해준다던 내일이 계속 고통스러운 오늘로 변할 테니까. 결국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행할 수밖에 없다. 머리가 온통 내일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매력적인 이성과의 데이트도, 근사한 지역으로의 여행도 그에게는 별다른 기쁨을 줄 수 없으니까. 또한 이 사람은 잔인한 사람이다. 노숙자의 비참한 삶도, 그리고 생계에 위협을 느끼는 이웃의 불안도 그에게는 별다른 느낌도 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처럼 염려는 우리를 불행하고 잔인한 분위기를 풍기는 고독한 자아로 만드는 심리적 메커니즘으로서, 우리의 사랑과 유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계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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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염려가 깊을수록 파시즘적 체제가 도래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아니 정확히 말해 파시즘적 체제는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염려를 증폭시키지 않는다면 탄생할 수도 없다. 그래서 어느 사회가 얼마나 파시즘에 노출되어 있는지의 척도는 항상 사회 성원들이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하는 염려의 정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파시즘적 체제만 인간의 염려를 증폭시키는가? 그렇지 않다. 파시즘보다 더 노골적으로 염려를 증폭시키는 체제가 있다. 바로 우리 시대의 자본이다. 주변을 돌아보라. 불확실한 미래상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금융상품들을 팔아 이윤을 남기는 거대자본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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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염려를 증폭시키는 정치 체제나 경제 체제를 바꾸는 것은 시급한 일이다. 물론 체제의 구조를 바꾸는 일은 고독한 개인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 이웃들 사이의 공감과 유대가 없다면, 어떻게 압도적인 구조를 넘어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불행히도 지금 우리는 체제가 증폭시킨 염려라는 심리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완전 딜레마다. 억압 체제가 극복된다면 우리의 염려 상태는 완화될 것이다. 우리의 염려 상태가 완화되지 않는다면, 억압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공감과 연대를 불가능하다. 여기가 바로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야 한다. 억압 체제가 없어지기를 기다리지는 말자.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증폭된 염려 상태를 완화시키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염려가 전제하는 시제인 미래를 부정하는 것이 그 출발점일 것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말이다. 사랑과 우정을 진정으로 나누고 싶은가? 이웃들과 공감과 연대를 꿈꾸는가? 그렇다면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삶에 집중할 수 있는 시제, 즉 현재,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을 꽉 잡을 일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강신주 / 철학자
(2012.7.9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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