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감나무가 있는 풍경

송담(松潭) 2010. 5. 13. 17:20

 

감나무가 있는 풍경 / 이동하

 

 

(....생략....)

 

해방되던 해 겨울 경북 경산군 남천면 소재 향리로 돌아온 그의 가족은 방 둘에 부엌이 전부인 세 칸짜리 초가에서 새 살림을 시작했다. 남쪽을 보고 맨 오른쪽이 부엌, 가운데가 큰방, 왼쪽이 작은방인 일자집이었다. 툇마루도 없다. 방문을 열고 나오면 댓돌이 놓여 있고, 거기서 한발 내려서면 바로 마당이다. 가을이면 타작마당이 되기도 하는 그 마당은 황토로 잘 다져져 있었다. 여름밤에 멍석을 펴고 누우면 흡사 초석 자리 깔린 방바닥처럼 등짝이 편안했다. 그가 평생 그렇듯 많은 별들을 본 것도 거기에서였다. 은하가 밤마다 그의 가슴으로 흘러들곤 했다. 쏴아쏴아 물소리를 내면서. 마당 한구석에는 염소 우리가 있어 이따금 방울을 짤랑거렸다. 염소는 그 시절 그의 가장 친한 동무였다. 하루에 반나절은 염소를 데리고 풀밭에서 놀았다. 어떤 날 밤에는 차가운 물이 머리를 적시는 느낌에 깜짝 놀라 눈을 떴더니 애기염소 한 마리가 혀를 내밀고 그의 이마를 정겹게 핥고 있었다.

 

마을에는 집집마다 으레 감나무가 한두 그루씩 있었다. 삼십 호쯤 되는 마을이었으므로 멀리서 보면 얼추 사오십 그루의 감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특히 수령이 백 년을 넘은 게 대여섯 그루는 되었는데 그의 집 뒤란에 서 있는 감나무도 그중 하나였다. 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심었다는 그 나무는 구새 먹은 둥치가 어른 팔로도 몇 아름이 되었다. 한여름에는 두터운 그늘로 뒤란을 덮을 만큼 잎이 풍성했고, 가을에는 곱게 물든 그 잎들을 풍성하게 떨구곤하던 나무였다.

 

대여섯 살 무렵부터 그는 봄을 기다릴 줄 알았다. 유독 추위를 타고 콧물 마를 날 없는 그가 겨우내 조바심치며 기다리는 건 해토의 봄이었는데 그것은 늘 감나무에서부터 왔다. 귓불을 간질이는 따끈한 봄볕과 느닷없이 몰아치는 꽃샘바람이 두어 차례 실랑이를 하고 나면 어느 날 돌연 감나무 어린 가지에 왁자하게 감꽃이 붙었다. 황백색의, 무수히 많은 작은 종들처럼. 그러면 어느새 봄의 한가운데 와 있었다. 골목마다 감꽃이 허옇게 떨어져 있었다. 어른들의 무심한 발길에 짓밟히기 전에, 또는 부지런한 농부의 비질에 쓸려 시궁창 속으로 떨어지기 전에 그는 그 작고 영약한 것들을 열심히 줍곤 했다. 그는 작은 대바구니 한가득 주워 온 것을 토방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면서 야금야금 먹었다. 부드럽고 달착지근한 맛이 참 좋았다.

 

감나무의 가을은, 문자 그대로 황금의 계절이다. 어른 손바닥보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더러는 노랗게, 또 더러는 빨갛게 물이 든다. 멀리서 보면 나무 전체가 거대한 왕관같다. 가을볕에 감들은 왜 그리도 선연한 빛깔인지! 꼭 왕관에 주렁주렁 매달린 홍옥류의 보석 같았다. 어쩌다 바람이 일면 흡사 보이지 않는 어떤 손이 왕관을 가만가만 흔드는 듯싶게 더 없이 눈부시고 위엄 있는 몸짓을 했다.

 

그 나무 아래서 그는 매양 황홀했다. 그는 점점 짧아지고 점점 식어가는 가을볕을 못내 아쉬워했다. 겨울이 좀 천천히 왔으면 싶었다. 하지만 겨울은 미적거리지 않았다. 거의 언제나 그답게, 불시에 진주했다. 그는 여지없이 방 안으로 쫓겨 들어갔고, 대부분의 시간을 갇혀 있어야 했다.

 

그래도 감나무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색신 고운 잎들을 말끔히 털어버린 감나무는 놀라우리만치 왜소해 보였다. 지난 계절에 본 모습들이 죄다 환상이었나 싶었다. 저 두터운 그늘과 화려한 의상을 다 잃어버린 채 앙상한 가지들만 치켜들고 입을 꼭 앙다물고 서 있어 무척 슬퍼 보였다. 게다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러 혹독한 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문구멍으로 틈틈이 감나무를 지켜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차디찬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앙상한 가지 끝에서 흔들리고 있는 몇 알의 까치밥들이 하마 떨어질까 싶어 늘 마음을 졸였다. 까치밥은 까치가 와서 먹고 가면 직박구리가 와서 쪼고, 나중에는 참새들이 차지했다. 그렇게 까치밥이 죄다 사라지고 나면 겨울이 한결 깊어져 있었고, 사나흘거리로 추위가 위세를 부리는 밤에는 산발치 방죽에서 두꺼운 얼음장이 터지는 소리가 쩌엉쩡 들려오곤 했다. 뒷날, 거의 평생을 떠나지 않았던 그의 마음속 추위도 어쩌면 그 무렵에 이미 씨를 떨군 게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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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등 9인 / ‘석양을 등지고 그림자를 밟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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