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詩, 글

매화

송담(松潭) 2010. 2. 19. 11:38

 

매화

 

 

매화는 참 더디 핍니다. 꽃망울이 맺히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꽃망울이 터져 꽃으로 몸을 바꾸는 데도 꽤 오랜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아침마다 오늘은 꽃이 피었을까 하고 나가 보면 어제 꽃망울 그대로인 날이 많습니다. 매화보다 내가 더 초조합니다. 매화가 필 때면 일어섰다 하는 아비처럼 맘이 분주합니다.

 

매화는 화려한 꽃이 아닙니다. 작고 조촐합니다. 매화는 진하고 뜨거운 꽃이 아니라 차고 맑은 꽃입니다. 다섯 장의 작은 꽃잎이 만든 소박하고 동글한 얼굴은 말수 적고 겸손한 사람의 얼굴입니다. 도시의 세련된 여인보다 시골이 고향인 순박한 여인의 얼굴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론에 밝은 학자보다 가난하고 진실한 선비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근원 김용준 화백은 “방 한구석에 있는 체도 않고 은사처럼 겸허하게 앉아 있는” 꽃이 매화라고 하면서 “앉은 자리에서 나에게 곧 무슨 이야긴지 속삭이는 것” 같아서 매화를 대할 때면 마음이 경건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를 대하매 아무 조건 없이 내 마음이 황홀해지는 데야 어찌하리까.”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퇴계 선생은 매화가 피는 겨울 섣달 초순에 운명하셨는데, 그날 아침 기르는 분매에 “물을 주어라”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퇴계 선생의 유언입니다. 퇴계 선생은 맑은 꽃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내면의 청진(淸眞)한 표상을 보았고, 그래서 매화를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그분들처럼 매화를 좋아하여 방안에 놓고 기르는 건 아니지만, 마당에서 자라는 백매 홍매를 보는 것만으로도 과분한 복을 누린다고 생각합니다. 매화는 환한 낮에 밝게 피지만 달 있는 밤에도 은은히 아름답습니다. 화사한 불빛보다 창호지를 밝히는 등잔불 같은 꽃입니다. 있는 듯 보이지 않고, 밤 깊어 적막해지면 비로소 스미는 암향이 좋은 꽃입니다. 저처럼 은은하고 청아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하는 꽃입니다.

매화처럼 고매하고 맑게 피다 갈 수 없겠지만 곁에서 행복한 시간이라도 누리고자 마당을 서성이며 꽃 기다립니다.

 

도종환 / ‘좋은생각’ 2010. 3월호에서

 

사진출처: 유형민갤러리

 

 

 

'아름다운 詩,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산도에서 보내는 편지  (0) 2011.07.29
감나무가 있는 풍경   (0) 2010.05.13
어린 왕자   (0) 2009.12.25
웃음자리별  (0) 2009.12.21
어찌 세상을 눈부시게 살까  (0) 2009.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