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족

부부, 군자의 길로 정진하는 수행의 동반자

송담(松潭) 2015. 7. 13. 10:24

 

부부, 군자의 길로 정진하는 수행의 동반자

 

 

‘프로포즈한 / 그날로 돌아가서 / 거절하고 싶다’

‘쓰레기 버리는 날 / 버리러 가지 않으면 / 내가 버려진다’

‘지금 집에 갈게 / 마누라의 답신 / 벌써 오려고?’

 

이것이 일본의 하이쿠(비구: 최대한 짧은 문구로 많은 것을 표현하는 일본 전통문학의 한 장르)경진대회에서 수상한 작품들이다.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아내에게서 외면당하는 남자들의 답답하고 불안한 심정이 배어나온다. 일본에서는 퇴직금을 분할 받고 이혼하려고 남편의 정년을 학수고대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는데, 그런 상황을 생각해 보면 위의 하이쿠들이 더욱 실감나게 들린다.

 

연애시절 충실하게 따르던 사랑의 각본, 결혼식에서 화려하게 연출하고 과시하던 환상적인 커플의 자태는 부부생활에 접어들어 곧 빛이 바래기 시작한다. 연인으로 사귈 때는 참으로 말끔하고 아리따웠던 아가씨가 후줄근하고 펑퍼짐한 아줌마로 변신해 간다. 밀어를 속삭이던 목소리는 바가지를 긁는 잔소리의 파열음으로 격양된다. 남편은 어떤가. 데이트 할 때는 그토록 너그럽고 매너 좋았던 사람이 집안일이나 친정에는 무신경하면서 소소한 일들에 걸핏하면 신경질을 부린다. 듬직했던 어깨가 그렇게 좁아 보일 수 없고, 근사했던 남성미는 치졸한 남성우월주의로 변질되어 간다.

 

나이가 들면서 ‘본색’은 점점 선명하게 들어난다. 젊은 날 서로에 대해 신선하게 유지했던 호기심이 퇴색해가면서 고리타분한 타성에 길들여진다.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부부보다는 부모로서의 정체성이 강해지는데, 교육열이 뜨거운 한국에서는 자녀의 뒷바라지를 위해 각자의 역할에 전력투구하다 보면 배우자 사이를 잇는 통로가 희미해진다. 모처럼 관계의 회복을 위해 여행을 떠나 보지만, 거기에서 오히려 갈등이 불거지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여름휴가가 끝난 뒤에 이혼율이 늘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아예 속 편하게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어울린다. 아이들 다 키워 놓고 이제 단 둘이 살갑게 지낼 만한 즈음에 남자들끼리 여자들끼리 등산을 다니는 모습에서 그러한 속사정을 짐작해 본다.

 

부부싸움을 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상대방의 식구를 싸잡아 비난하거나 문제의 원인으로 물고 늘어지는데 있다. 그리고 명절을 시댁에서 보내면서 쌓인 불만을 마음에 억누른 아내가 귀가하여 터뜨리면서 싸움이 나는 경우가 많다. 자가용을 타고 멀리 고향을 다녀오는 길도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정체가 심해서 짜증이 나는데 차 안에서 티격태격 다툼이 시작되면서 삽시간에 격렬한 감정으로 돌변할 수 있다. 집 안에서라면 한 사람이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겨 잠시 냉각 시간을 가질 수 있지만, 자동차라는 폐쇄공간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별것 아닌 말투 하나로 시비가 붙다 보면 걷잡을 수 없는 분규로 이어지기 쉬운 것이다. 그러니 시댁을 나와 귀가할 때 부부사이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싶으면 한 사람은 따로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것이 안전할 듯싶다.

 

세상 꼭대기에서 단 둘이 포옹하고 있는 듯한 극락의 황홀경에 취하다가도, 돌연 가슴에 싸늘한 냉기류를 내뿜으며 반목(反目)의 구렁텅이로 추락하기도 하는 것이 부부관계다. 정말로 별 것 아닐 수 있는 일이나 말 한마디로 감정이 뒤집히고 유치한 신경전에 말려들기도 한다. 작은 것은 작은 것이 아니다. 사소한 일에 정성을 다하고 너그러움으로 상대방을 품어 주는 그릇이 없으면 늘 어긋나고 끊임없이 부딪히게 되어 있다. 그 함정들을 조심스레 살피면서 원숙한 파트너로 동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수행이라 할 수 있다.

 

군자의 도는 평범한 부부 사이에서 시작되지만,

그 지극한 경지는 하늘 땅 끝까지 미친다

(中庸에서)

 

부부 사이에서 시작된 군자의 도가 천하에 이른다는 중용의 구절을 되새김질해 본다. 부부가 그러한 경지를 향해 정진하는 도반(道伴)으로 맺어지면, 함께 내딛는 발걸음은 육중하면서도 가뿐하다. 경청과 공감의 지대를 넓히면서 변화와 성장을 꾀하고 그 대견한 모습을 격려하는 부부는 서로를 고분고분 닮아간다.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를 맞춰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 함민복, 「부부」

 

김찬호 / ‘생애의 발견’ 중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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