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통치 철학으로서의 유교

송담(松潭) 2008. 11. 15. 19:33

 

통치 철학으로서의 유교



 현실에서는 강자만이 살아남는 법이다. 춘추 전국의 혼란에서 승리를 거둔 쪽은 강력한 군사력과 엄한 법을 강조하는 법가였다. 법가 사상을 바탕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진 진(秦)나라는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다. 진나라 시황제(始皇帝, 기원전 259~210)는 통일이 되자 국가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법가 외의 모든 사상 관련 서적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산 채로 파묻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했다. 그러나 그토록 무시무시한 절대 권력을 휘두른 진나라는 20년도 지나지 않아 멸망해 버리고 말았다. 전쟁보다 더한 억압과 폭력을 백성들은 견뎌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뒤 혼란이 찾아왔고, 세상은 항우(項羽, 기원전 232~202)의 초(楚)나라와 유방(劉邦, 기원전247?~195)의 한(漢)나라로 나뉘어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이번에 승리를 거둔 쪽은 산도 뽑을 만한 괴력을 지닌 사나이 항우가 아니라 소탈함과 편안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유방이었다.


 새로운 권력이 등장할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이전의 통치자들과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한 폭력을 행사하던 진나라에 질린 사람들에게 한나라는 어떤 통치 원리를 내세워야 했을까? 당연히 ‘평화와 관용’일 터였다.


 그러나 한 고조 유방에게는 ‘사람들이 알아서 기게 만드는’ 카리스마가 없었다. 유방은 평민 출신이었다, 특유의 털털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샀지만 그게 단점이 되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유방은 학자의 모자에 오줌을 싸며 모욕을 주기도 하고, 술에 취해 애꿎은 기둥에 칼질을 해 대기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두목쯤이면 몰라도 군주로서는 영 마뜩찮은 인물이었다.


 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학파는 황로(黃老) 사상이었다. 황로 학파의 핵심은 흔히 청정무위(淸淨無爲)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는 한마디로 ‘Let it be!', 내버려 두라는 뜻이다. ‘억지로 무엇을 하려 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고 쓸데없이 간섭하지 마라.’고 이야기하는 황로 사상은 진나라의 엄격한 통치에 잔뜩 주눅 들었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황로 사상은 숲 속에 숨어서 사는 이들한테는 좋을지 몰라도 거대한 국가를 이끄는 이념이 될 수는 없었다. ‘강제도 의무도 없는 국가가 가능할까?’라는 문제 앞에서 황로사상은 별다른 현실적인 답을 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의 사상은 화려하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나라 초기의 사상가 육가(陸賈)는 여전히 풍운아 기질을 못 버린 유방에게 따끔한 충고를 던졌다.

“어떻게 말 위에서 천하를 안정시키겠습니까?”

무력은 싸움할 때는 요긴한 수단이지만 평화로울 때는 애물단지일 뿐이다. 사회를 유지하려면 힘깨나 쓰는 사람보다 머리와 수단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거기다 백성들의 삶을 올곧게 잡아 주고 문화를 풍요롭게 해주는 사상이 있어야 한다. ‘무력보다는 문치(文治)를!’ 한나라 초기의 시대적 요구는 이랬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자의 사상은 둘도 없이 적당한 사상이었다. 공자는 폭력을 혐오했다. 사랑(인:仁)과 처신(예:禮)을 강조하여 알아서 윗사람을 존경하고 스스로의 처지에 만족하게 하는 유가의 주장은, 겁먹은 민중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뿐만 아니라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는 효과가 있었다.


 결국 공자의 사상은 4대가 흘러 무제(武帝, 기원전 156~87 ? 제7대 황제로, 한나라의 권위를 크게 높이고, 중국의 영향력을 해외로 확대했음)때에 이르러서 ‘국가 철학’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동중서(기원전 198?~106?)라는 걸출한 학자의 손에 의해 가능했다.


 동중서는 먼저 공자를 통일 제국을 이끌 ‘문치 프로그램’의 창시자로 끌어올렸다. 공자는 혼란기 ‘무관(無官)의 제왕(帝王)’(왕관이 없는 제왕)으로, 진정 사랑이 가득 찬 성군(聖君)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뜻대로 시대를 바꿀만한 권력이 없었다. 이제 한나라는 공자가 만든 통치 프로그램대로 세상을 이끌 유일한 제국이므로, 공자의 사상이 존경스럽다면 한 제국에게도 복종해야 한다.


 나아가 그는 황제의 위치를 ‘하늘의 아들(天子)’로 높였다. 그러고는 하늘의 영원한 뜻을 받들어 백성과 자연을 조화롭게 하는 게 황제의 역할이니, 그에게 감히 반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통치자는 하늘에 떠있는 태양과 같아서 한없이 자애로워야하며, 사사로이 백성들을 자질한 일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군주는 인품과 도덕으로 백성을 이끌되 돈이나 이익에 초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권력과 백성의 삶은 제자리를 찾았다.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고도 조화를 이루며, 강제하지 않아도 우러나오는 존경심으로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하라.’ 동중서는 이처럼 시대가 진정 요구하는 ‘통치의 황금율’을 세웠던 것이다.

 

 역사 교과서에는 “한 무제 때 동중서가 유학을 국교화했다.”는 말이 나온다. 실제로 무제가 통치했던 기간은 중국의 긴 역사 안에서 유교가 메이저급 철학으로 떠오르게 된 주요 승부처였다. 그 뒤 거의 모든 왕조는 유학의 이념을 바탕에 깔게 되었고 2,000년이 넘은 세월 속에서 공자의 가르침은 자연스레 생활 곳곳에 침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절대 강자는 항상 절대 약점도 갖게 마련이다. 유교는 역사적으로 검증된 효율적인 ‘사회 안정 시스템’이었지만 그만큼 폐해도 많았다. 실무적인 능력보다 인품과 조화를 강조하는 관료적인 분위기, 돈을 천하게 여기고 실용적인 관심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관행 등도 모두 유교에서 나왔다.


 ‘비지니스형 통치자’는 항상 선거철이면 등장하는 구호다. 그만큼 이 시대는 지도자에게 실무 경영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요구한다. 인품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이끌어내고, 알아서 사회를 움직이게 한다는 유교의 군자(君子) 개념은 2,500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동양의 전통적인 군주상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임금에게 ‘장사치’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거센 변화의 물결 앞에 동북아시아의 ‘문화코드’인 유교는 과연 어떻게 대처해 나갈까?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안광복 / ‘철학, 역사를 만나다’중에서


* 윗 글은 독자가 내용중 일부를 발췌 정리한 것이며,

   글의 제목 ‘통치  철학으로서의 유교’는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습니다.

  원래 책 속의 제목은

  ‘공자와 동중서, 도덕과 의리는 한(漢) 제국의 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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