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정신이 대상을 구성한다

송담(松潭) 2008. 1. 29. 07:04
 

 

정신이 대상을 구성한다



 전통적으로 인식 또는 지식은 인식 주체, 즉 정신의 바깥에서 온다는 게 기본적인 믿음이었다. 앎의 근원은 외부에 있고 모든 앎이 정신 활동의 바깥에서 온다는 것은 불변이었다. 실체는 언제나 그 자체로 존재하고 정신은 외부의 그것을 인식하는 그것을 대상으로 삼았을 뿐이다. 실체의 존재론적 우월성은 영원하다!


 그런데 칸트는 그런 구도를 완전히 뒤집어 정신이 대상을 구성한다고 본 것이다. 내가 정신활동을 통해 대상을 지각한다고 해서 대상 자체가 변하는 건 아닌데, 어떻게 정신이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까? 물론 염력을 지닌 초능력자가 아니라면 인식만으로  대상을 변형시키거나 옮길 수는 없다. 칸트의 말은 대상을 정신이 마음대로 바꾼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정신 안에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칸트는 인식을 감성과 오성으로 나눈다. 감성은 감각기관을 통해 주어진 자료를 받아드리는 능력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식의 일부일 뿐 인식 전체가 아니고 경험론에서 말하는 경험과도 다르다. 감성이 받아드린 자료가 정신 안에서 개념화될 때 비로소 인식이 완성되고 이것을 경험이라 할 수 있게 된다. 이대 개념화라는 기능은 바로 오성이 담당한다. 즉 인식은 감성이 감각을 받아드리고 오성이 개념을 부여하는 2단계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눈과 귀가 아름다운 그림이나 감미로운 음악을 보고 듣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신 내부에 그림과 음악 같은 외부의 실재와 동일한 구조의 존재방식을 가진 형식이 있어야 한다. 텔레비전이 영상을 잡아서 보여줄 수 있는 이유는 영상과 관련된 장치가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고, 오디오가 디스크의 음악을 재생해줄 수 있는 이유는 음원을 녹음한 것과 같은 구조의 장치가 오디오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신의 내부에도 대상의 존재방식을 닮은 장치가 있을 터이다. 아무리 실재가 인상적인 감각재료라고 해도 정신 내부에 그 자료를 가공할 수 있는 설비가 없으면 인식이라는 제품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외부의 실재와 정신의 형식이 서로 어울려야만 인식이 가능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표현한다.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순전히 정신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내용 없는 사유)도 아니고

그 사물에서 나오는 감각자료로만 이루어지는 것(개념 없는 직관)도 아니라는 의미다.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두우며, 생각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 논어의 이 구절은 인식론과 무관하지만 칸트의 말과 비슷한 메시지다.


 릴케의 비유로 말하자면 젊은 시인과 마도로스의 차이다. 시를 쓰려면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젊은 시인은 많은 시를 읽었고 문학이론과 작법에 관해 배웠다. 그러나 그 공부는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았기에 공허하다. 반면 마도로스는 여러 나라의 수많은 항구들을 다니며 숱한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그 경험은 맹목적이기에 마도로스는 시인이 되지 못한다. 젊은 시인은 알지만 보지 못했고 마도로스는 보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칸트가 말한 ‘내용 없는 사유’란 대륙의 합리론이라 불리던 과도한 이성 중심주의를 비판한 것이며, ‘개념 없는 직관’이란 영국의 독단적인 경험론을 비판한 것이기도 하다. 릴케가 젊은 시인과 마도로스를 종합했듯이 합리론과 경험론은 칸트에게서 각각의 모순을 지양하고 종합을 이룬다.


남경태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철학’중에서 발췌정리

 


< 참고 >


‘발췌정리’라 함은 문장이나 문단이 책에서와 같이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독자가 나름대로 부분들을 취하여 연결하였다는 뜻임


몇 년 전에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표현에 대해 칸트가 아닌 파스칼의 말로 혼동을 했고, 그 뜻을 잘 모르면서 인용하여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잘못된 이해였습니다.


저 나름대로 정리해 보면

내용 없는 사유 = 경험 없는 정신 (과도한 이성중심주의 비판) (시인)

개념 없는 직관 = 정신 없는 경험 (독단적인 경험론 비판) (마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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