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도 시간도 제각각 - 인지생물학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독일의 생물학자 야콥 폰 윅스퀼(1864~1944)은 오랫동안 동물의 행동에 대해 연구하던 끝에, 모든 동물은 스스로 하나의 임의의 가상세계를 구성하여 산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의 저서 <생물에서 본 세계>에 실린 실험들 가운데 예를 들면 이렇다.
까마귀는 눈앞에 메뚜기가 앉아 있어도 잡아먹지 않는다. 그러다가 메뚜기가 뛰려고 움직일 때 비로소 쪼아 먹는다. 이것은 까마귀가 어른거리는 풀 이파리 같은 장애물 때문에 메뚜기를 알아보지 못해서 그럴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윅스퀼은 많은 실험 끝에 움직이지 않는 메뚜기는 까마귀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다만 움직이는 메뚜기만이 메뚜기로 인지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곤충들이 천적들 앞에서 죽은 체하는 이유도 설명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수많은 실험과 관찰을 거쳐 윅스퀼이 내린 결론은 동물들은 각기 서로 다른 ‘행동능력’과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능력들에 따라서 각자 서로 다른 자신만의 가상세계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동물들이 스스로 구성한 가상세계를 ‘환경세계(umwelt)'라고 불렀다.
윅스퀼은 우선 “동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의 수만큼 자신의 환경 세계 내에서 대상물을 구분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즉 더 많은 행동능력을 가진 그만큼 많은 사물들을 구분할 수 있는 인지능력을 갖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파리는 벽과 문을 구분하지 못한다. 파리는 문을 열고 나가는 행동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나 발로 문을 밀치고 나가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개는 벽과 문을 구분하여 인지한다. 같은 이치로 파리나 개는 가령 벽에 피카소 명화 ‘게르니카’가 걸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벽과 구분할 수 없다. 오직 미술 감상이라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만이 벽과 피카소의 명화를 구분하여 인지한다.
이처럼 행동능력과 인지능력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인지능력에 다라 각 동물이 구성하는 세계가 다르다. 그래서 서로 다른 동물들은 설사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공간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윅스퀼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 빠르기로는 지각할 수 있는 순간의 길이가 18분의 1초이다. 따라서 눈은 18분의 1초 보다 짧은 시각은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연이어지는 그림을 1초에 18장 이상 빠르기로 보여주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는 것이다. 이것이 활동사진, 곧 영화의 원리이다. 귀는 공기 진동이 1초에 18이상이 되면 단일한 소리로만 듣고, 피부는 1초에 18번 이상 타격을 주면, 하나의 지속적인 타격으로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버들붕어는 어떤 영상이 1초간에 18회 정도 보이는 경우에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적어도 1초간에 30회 이상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반대로 달팽이는 1초에 3회 이하로 느리게 움직이는 물체의 움직임만을 알아볼 수 있으며, 1초에 4회 이상 움직이는 달팽이에게 고정된 물체로 보인다는 것을 윅스퀼은 간단한 실험을 통해서 알아냈다. 결국 달팽이에게는 모든 운동이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빠른 템포로 진행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달팽이가 길을 가다가 거북이에게 강도를 당했다. 경찰이 출동해 달팽이에게 범인의 생김새를 묻자, “글쎄요, 워낙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서.......”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보자, 아무도 없고 달팽이 한마리가 초인종 위에 붙어 있었다. 그래서 그 달팽이를 떼어 잔디밭에 던지고 들어왔다. 그런데 1년 뒤 다시 초인종이 울려 나가보니, 다시 달팽이 한 마리가 초인종에 붙어 “당신, 조금 전에 나에게 무슨 짓을 했어!”라고 항의하더라는 것이다.
..........(생략)........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파악하는 세계는 단지 우리만이 가진 특별한 행동능력과 인지능력에 의해 구성된 가상세계일 뿐이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은 우리가 구성한 가상세계에 대한 지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김용규/ ‘철학 통조림4’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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