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이분법에 술래 잡힌다면?

송담(松潭) 2007. 11. 23. 14:32

 

 

이분법에 술래 잡힌다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 ‘햄릿’에 나오는 이 명대사는 초등학생들도 인용할 정도다. 여기서 원문(To be, or not to be)을, 원래 의미에 충실하고자 “존재하느냐, 마느냐”라고 번역하거나, “있음이냐, 없음이냐”라고 옮기기도 한다. 이 독백에서 유심히 보아야할 점은 그것이 이분법의 구조를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분법은 세계를 인식하는 한 방식이다. 인간이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식의 편리함 때문이다. 이분법적 접근은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손쉽게 충족시켜주며, 인식의 효율성과 편리성을 제공한다. 물론 그에 따른 사고의 단순화와 편리함이라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이분법적인 사고가 어느 정도 자연의 법칙에 근거하는 것도 사실이다. 양극과 음극, 암컷과 수컷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자연의 법칙이 이분법적이라 할지라도, 마치 밤과 낮 사이에 황혼과 여명이 있듯이, 그 안에는 제3의 가능성, 제4의 가능성, 더 나아가 n개의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자연의 절도이다.

 

 이분법적 사고보다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인간이 항상 대상을 대칭적 또는 ‘등가적 이분구조’로 보고자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행복과 불행, 전진과 후퇴, 사느냐 죽느냐 같은 문제를 항상 대칭적이고 등가적인 이분법으로 보고자 할 때, 우리는 어떤 결정도 할 수 없게 된다. 두 대상이 동일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면, 당연히 선택하기가 어려워진다. 등가적 이분법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는 이미 장애요인이 발생하는 것이다.

 

 햄릿이 헤어날 수 없는 고민에 빠진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삼촌이 아버지인 국왕을 살해하고 왕이 된 다음 왕비인 어머니마저 차지했다는 사실을 아버지의 유령으로부터 듣고 난 햄릿은 괴로워한다. 그의 존재론적 고민이 얼마나 심오한지 모르겠지만, 햄릿이 이 모든 상황을 등가적 이분구조 안으로 우겨 넣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햄릿은 이분법적 사고가 다양한 가능성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햄릿은 자신을 이분법적 갈등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스스로 이분법 놀이의 술래가 된 것이다. 이분법에 술래 잡혀 있는 사람은 결행은 못하지만, 자신을 과격한 망상으로 몰고 가기 싶다. 햄릿의 저 유명한 독백을 다시 들어보자.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을 것인가, 아니면 무기를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낼 것인가.” 이분법적 의식이 발생시킨 이 과격한 망상 때문에 오히려 그는 또 한 번 고뇌를 미룬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고뇌의 소용돌이에 놓을 뿐만 아니라, 타인들조차도 억압하게 된다. 사랑하는 여인 오필리아의 삶까지 존재와 비존재의 구조 안에 환원시켜, 그녀에게 ‘비존재의 선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그녀에게 이 세상에서 ‘없음’을 선택하라고 억압한다.

 

 햄릿을 우유부단한 성격을 지닌 남자의 대명사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극중에서 햄릿은 지나치게 분명해서 모순에 빠지는 사람이다. 햄릿의 사고가 망설임 없이 너무나 분명한 틀을 가졌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단호한 것 같으면서도 모호해진다. 햄릿의 복잡성은 오히려 단순한 이분법 때문에 유발된 것이다. 세계를 명확하게 구분해서 이분법의 틀로 인식할 때. 누구에게든 선택과 결행은 어려워진다.

 

김용석 / ‘철학정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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