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호모 루덴스(home ludens)

송담(松潭) 2007. 11. 1. 09:59
 

 

호모 루덴스(home ludens)



 누구에게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은 법이다. 뜻대로 되지도 않고 당하고만 사는 듯한 억울함이 마음 한편을 늘 짓누르곤 한다. 특히 경기(景氣)가 바닥을 헤매고 마음 환해지는 좋은 소식을 듣기 어려운 시절에는 더욱 그렇다. 이럴 때 스포츠 기사는 더더욱 인기를 끈다. IMF 때 박찬호는 ‘국민의 희망’이다시피 했고, 2002년의 월드컵 전사들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영웅이었다. 우리는 매일같이 스포츠 신문기사를 보면서 느낀다. 스포츠 스타들이야말로 진정 이 시대 서민들의 당당한 영웅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도덕군자들에게는 스포츠만큼 못마땅한 것도 없다. 그들의 눈에 스포츠 선수들이란 비싼 밥 먹고 땀 뻘뻘 흘리며 애들이나 하는 놀이에 빠져 있는 허접한 인간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수십억씩 주는 사람들이나, 그들이 노는 것을 입장료까지 내가며 보는 이들도 정신 나갔기는 매한가지이고 말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쥐꼬리만큼 버는데 ‘논다니’들은 돈을 쓸어 담고 있는 작금의 세태가 제대로 된 것일 리 없다. 이 사회는 병들어 있고 정신 차리지 못하면 이애 망하고야 말 터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충고들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다. 먹고살기 위해 애쓴다는 점은 짐승이나 인간이나 똑 같다.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은 ‘먹고살기’를 넘어서는 지점부터다. 끼니 걱정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일이란 ‘지옥 같은 노동일’에 불과하다. 이들의 삶이란 채찍을 맞으며 힘들게 수레를 끄는 짐승의 생활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자기실현’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일은 생계수단을 넘어선 즐거움이고 보람이다. ‘인간다운 노동’이란 노동자 자신에게는 즐거움을 주는 놀이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인류 문명의 위대함은 일보다 ‘놀이’에 있다. 미술과 음악도 처음에는 더 많은 산출을 내기 위한 주술적(呪術的) 목적에서 이루어졌지만 역사가 발전할수록 예술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활동으로 여겨졌다.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먹고사는 데 꼭 필요한 그 무엇으로 더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이처럼 예술의 가치를 알아보는 유일한 존재도 인간뿐이다. 때문에 호이징가(1872~1945 네델란드 역사가) 같은 학자들은 인간의 특징을 ‘놀이’에서 찾곤 한다. 그는 인간이란 생존과 상관없는 일에도 몰두하고 보람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비로소 ‘인간답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home sapiens:생각하는 인간)이기 전에

호모 루덴스(home ludens:놀이하는 인간)다.


더 나아가 호이징가의 논리대로라면 삶이란 그 자체로 커다란 놀이판이다. 그는 놀이의 특징으로 크게 3가지를 든다. 첫째, 그 자체로 즐기기 위해 이루어진다는 점. 둘째, 술래잡기에서 숨을 수 있는 범위와 도망갈 시간을 정하듯 약속된 시공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셋째, 따라야할 규칙이 있다는 점 그것이다. 축구에서 조건부로 공을 손으로 잡으면 안 된다고 정하듯 말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우리네 삶은 영락없는 ‘놀이’다. 삶이란 살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기본 전제이자 목적인 활동이다. 게다가 우리는 놀이에서 하듯 시간과 장소에 따라 약속된 행동 규칙을 따른다.


 자수성가한 억만장자들 중에는 의외로 돈 버는 일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별로 없다. 일을 즐기며 몰두하다보니 자산도 모르는 사이에 돈이 생겨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빌 게이츠가 그렇고 안철수가 그랬다. 또한 우리는 삶을 ‘놀이’로 받아드릴 때 비로소 너그러워질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이란 형태의 ‘게임종료’를 맞아야 할 운명이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으고 명에를 쌓았다 해도, 이는 결국 게임장에 두고 나가야 할 칩(chip)에 불과하다. 반대로 꼬여만 가는 듯한 생활도 안 풀리는 ‘게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지는 훨씬 많아질 것이다. 물론 ‘인간다운’ 생존을 보장하는 사회 안전망이 갖추어졌음을 기본 전제로 하고서야 할 수 있는 말들이다.


 이승엽이 300호 홈런을 쳤단다.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지만 이런 소식을 들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스포츠는 진지하지만 결국은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네 삶도 그렇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 ‘지금 매순간에 충실하라’는 라틴어)! 삶을 즐기라는 뜻이다. 스포츠를 대하듯 놀이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삶의 ‘참맛’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것이다.


안광복 / ‘철학의 진리나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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