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칼럼, 정의 20

노예제 일상

노예제 일상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고용 유연화 정책의 하나로 파견법이 도입되었다. 정식 명칭은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지만 직접고용 원칙을 파괴함으로써 노동자의 삶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위태롭게 만들었다. 법 제정 당시에도 간접고용의 폐해에 대한 우려가 쏟아졌지만, 슬그머니 법이 통과되었다. 비상시국이기에 비상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비상시국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인 노동의 일상을 회복할 것이라 믿었다. 2001년 구제금융을 모두 상환하고 외환위기 극복 선언이 있었지만, 이 믿음은 처참히 배반당했다. 오히려 2007년 비정규직 보호 명목으로 여러 법을 시행하여 온갖 비정규직을 합법화했다. 현재 누구도 도덕적으로 책임지지 않는 비정규직이 넘쳐..

명칼럼, 정의 2021.02.05

지구촌 3% 부자로 살아가는 법

지구촌 3% 부자로 살아가는 법 어지럽다. 눈뜨면 오르는 부동산 가격에 주식·비트코인 열풍까지 세상이 온통 ‘돈’ 얘기다. 세계적인 투자자는 금과 달러를 사라 하고 어떤 이는 당분간 호황세를 장담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위기를 예언한다. 대개는 맞을 수도 있고 틀려도 그만인 이야기들로 전문가라기보다 역술인들 같은데 재미를 본 사람들은 신이 나서, 기회를 놓친 사람들은 겁이 나서 모두들 달려든다. 나만 뒤처지는 건가 슬며시 걱정도 된다. 부자로 살아본 경험이 없다. 온갖 꽃과 식물, 새와 벌이 어우러진 정원이 있는 고택에서 놀던 유년의 기억이 내 인생에서 가장 부티 나는 시절이었다. 양친은 모두 몰락해가는 부잣집 장남, 장녀로 자존감과 교양은 있었지만 세상 사는 요령이 부족하고 과하게 고지식한 분들이었다. ..

명칼럼, 정의 2021.01.20

영초언니

영초언니 야학은 구로공단 끄트머리 골목길 안쪽 허름한 3층 건물에 세들어 있었다. 두 야학이 탁구장만한 공간을 베니어판으로 칸을 나누어 썼다. 옆 야학은 주로 서울대 재학생들이, 우리 야학은 서울대생과 고대생이 반반씩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은 대부분 근처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이었고, 남학생은 가뭄에 콩 나듯 한둘이 고작이었다. 서울대 출신 교사들 가운데 심재철(현 국회부의장)이라는 내 동갑내기가 있었다. 보기 드물게 잘생긴 미남인데다 전라도 출신이라 그런지 판소리 한 대목도 그럴싸하게 잘 뽑는 재주꾼이었다. 어느 날 나는 "심재철, 그 친구 참 잘생겼지? 아폴론처럼 생겼더라. 하고 엄주웅에게 무심코 말했다. 그는 볼이 잔뜩 부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걔가 아폴론이면 나..

명칼럼, 정의 2018.03.09

휴가 시즌이 서글픈 취준생의 여름나기

휴가 시즌이 서글픈 취준생의 여름나기 먹지 않아도 아는 맛이 있다. 외롭고 쓸쓸한 맛이다. "모르는 사람과 마주앉아서 김밥으로 점심을 먹는 일은 쓸쓸하다. 쓸쓸해하는 나의 존재가 내 앞에서 라면을 먹는 사내를 쓸쓸하게 해주었을 일을 생각하면 더욱 쓸쓸하다. 쓸쓸한 것이 김밥과 함께 목구멍을 넘어간다." - , 김훈 먹지 않아도 아는 맛이 있다. 외롭고 쓸쓸한 맛이다. 모두가 떠난 곳에 남아본 적 있는 이는 알 것이다. 그해 설에는 유독 눈이 많이 왔다. 폭설이 발걸음 소리마저 삼켜버린 그날도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나처럼 갈 곳 없는 한 줌의 취준생들이 책상을 지키고 있었다. 섬처럼 넓은 책상을 쓰면서도, 낯모를 그들이 있어 조금은 든든했다. 두려운 건 배고픔이다. 연휴에는 학생식당도 문을 닫는다. 기..

명칼럼, 정의 2017.12.18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26세 유시민이 쓴 항소이유서는, 그렇게 전설이 됐다” 기사입력/수정 : 2017-06-10 12:32 오후 [Dispatch=김희경기자] 1984년, 당시 유시민 작가의 나이는 26세. 유시민은 차가운 구치소 바닥에서 글을 써내려갔다. 한 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됐다. 자신에 대한 판결이 부당하다는 호소문, 오타가 났다고 두 줄 그어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차디찬 방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펜을 들어 재판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14시간을 쉼없이 썼다. 단 한 번의 퇴고도 없었다. 그것이 바로 전설이 된 항소이유서다. 유시민은 9일 tvN ‘알쓸신잡’에서 구치소에서 항소이유서의 뒷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1984년 서울대 학원 프락치 사건 주모자로 몰렸고, 1심에서 징역형을 선..

명칼럼, 정의 2017.06.10

박정희를 청산해야 할 이유

박정희를 청산해야 할 이유 정유년 새해가 밝았다. 늘 세월은 흐르고 새해가 오지만 올해는 범상한 해가 아니다. 추운 날씨에도 1000만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은 오직 불의에 분노하고, 나라가 바로 서기를 바라서였을 것이다. 이 열망이 이번에는 실현될까? 과거 몇 차례 찾아왔던 호기를 번번이 놓쳐버린 우리가 과연 적폐를 청소하고 새 나라를 세울 수 있을까? 물론 첫 단계는 박근혜, 최순실 일당의 불법을 밝혀내 엄정한 법의 심판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 정도로 새나라 건설은 안된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한국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신화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잘했는데, 그 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건 틀린 생각이다..

명칼럼, 정의 2017.01.06

‘시대의 스승’ 신영복 선생의 타계와 ‘연대의 가치’

‘시대의 스승’ 신영복 선생의 타계와 ‘연대의 가치’ 스물일곱 청년이 감옥에 갇혔다. 20년 20일 만에 세상으로 나왔다. 쉰을 바라보는 중년이었다. 분노와 회한으로 가득 찰 법했지만 아니었다. 낮은 어조로 인간의 가치를, 공감과 공존을 이야기했다. 모진 고통을 희망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인간성의 고귀함을 증명했다. 은 혁명적 언어가 아니었으나, 많은 이들의 내면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다. 누군가는 위로를, 누군가는 깨달음을, 또 다른 누군가는 삶의 나침반을 얻었다. ‘무기수 신영복’은 시대의 스승이 되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타계했다. 고인은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 지성이자, 앎과 삶이 일치한 지식인이자, 절제와 품격을 갖춘 ‘어른’이었다. 빈소가 차려진 성공회대에 수많은 시민의 발길이 이어지는 까..

명칼럼, 정의 2016.01.18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는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이..

명칼럼, 정의 2016.01.09

호남의 恨

호남의 恨 역사의 고장 호남은 저항과 충절의 땅이다. 호남인들은 사회적 모순에 온몸으로 저항했고 시대정신을 선도했으며 무엇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의 젖줄 호남 땅은 역설적이게도 저주의 땅이 되었고, 그래서 한이 짙게 서린 고장이 되었다. 진취적인 기상으로 아시아의 바다를 누비며 동양의 로마를 꿈꾸던 백제가 거친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와 함께 외세와 야합한 폐쇄주의적인 신라에 멸망당한 것은 민족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집단 자폐증에 걸린 그 후손들이 쉼 없이 벌인 호남에 대한 부당한 저주와 핍박은 호남인들에게 저항정신을 심어주었고, 그 저항정신은 대국적인 의(義)로 승화되어 호남을 충의의 땅, 역사의 고장으로 만들었다. 부당한 저주에 호남인들은 한이 맺혔고, 그 한을 삼키며 ..

명칼럼, 정의 2013.02.21

정치, 하지마라

정치, 하지마라 ‘정치, 하지마라.’ 이 말은 제가 요즈음 사람들을 만나면 자주 하는 말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하는 말입니다.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여 잃어야 하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하는 목적이 권세나 명성을 좇아서 하는 것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성공을 위하여 쏟아야 하는 노력과 감수해야 하는 부담을 생각하면 권세와 명성은 실속이 없고 그나마 너무 짧습니다. 이웃과 공동체, 그리고 역사를 위하여, 가치 있는 뭔가를 이루고자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한참을 지나고 나서 그가 이룬 결과가 생각보다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열심히 싸우고, 허물고, 쌓아 올리면서 긴 세월을 달려왔지만, 그 흔적은 희미하고, 또렷하게 남..

명칼럼, 정의 2009.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