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칼럼, 정의

타는 목마름으로

송담(松潭) 2016. 1. 9. 18:12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는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이 시는 내게 폴 엘뤼아르(Paul Eluard)가 대독 레지스탕스를 노래한 시 <자유>를 연상케 했다. 이 시에는 한국인들뿐 아니라 나처럼 갇힌 상태에 있는 재일조선인, 나아가 해방을 갈구하며 몸부림치는 전 세계 사람들의 심정에 사무치게 호소하는 빼어난 보편성이 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참고로 노파심에서 말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 시를 썼던 김지하는 이후 어지러운 행보를 보이면서 1970년대, 1980년대에 자신이 발했던 보편적인 주장들을 스스로 완전히 배반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번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여당 쪽, 즉 김지하 자신을 비롯하여 민주화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독재자의 딸을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민주주의는 무자각한 채로 단말마의 시기를 맞이하고, 한국에서는 일찍이 타는 목마름으로라고 노래하던 시인이 스스로 자신의 시를 배반하는 비참한 꼴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 이 시를 알게 된 나는, 인간은 이렇게나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이처럼 자랑스레 빛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뿐 아니라 일본인을 포함하여 세계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감격을 공유했으며 한국 민주화 투쟁을 응원했다. 그런데 이제 그처럼 빛나던 시인이 이렇게 범용하고 어리석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라는 시대의 암흑이다. 예전과 같은 폭력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지 않더라도 인간 정신에 대한 소름 끼치는 실망과 냉소가 만연해 있다. 우리는 앞으로 이 냉소의 어둠 속을 살아가야만 한다.

 

 이미 1990년대 초부터 나는 수차례에 걸쳐 김지하를 비판한 적이 있다. 그는 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국내 지인들에게 물으니, 그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김지하라는 것은 한 개인의 이름이라기보다 하나의 집합명사이고, 암흑시대에 함께 싸웠던 이들의 정서가 집합적으로 김지하의 시에 결정되어 나타난 것이며, 그 책임도 명예도 김지하 개인에게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어떤 시대정신을 비추어낸 시의 가치가 그것을 쓴 시인 개인의 존재를 넘어서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문제는 시인과 시라는 것의 관계에 관해 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성찰로 우리를 이끈다.

 

 하지만 그렇다면 김지하 개인이 보인 천박함 또한 그사람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온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공유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김지하라는 개인이 유별난 기인이고 어리석은 자였다면 문제는 간단하고 탄식할 필요조차 없다.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나는 앞으로 보고 싶지 않은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서경식 / ‘시의 힘중에서

 

 

 

 

 

 

사진출처 : 구글 이미지

 

 

 

 

 

인간은 승리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가 이기고 있기에 정의에 관해 묻고,

허위로 뒤덮여 있기에 진실을 말하려고 싸운다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자로서 가져야 할 도덕(moral)의 이상적 모습이다.

 

서경식 / ‘시의 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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