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칼럼, 정의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송담(松潭) 2017. 6. 10.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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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유시민이 쓴 항소이유서는, 그렇게 전설이 됐다

 

기사입력/수정 : 2017-06-10 12:32 오후

 

[Dispatch=김희경기자]

 

1984, 당시 유시민 작가의 나이는 26. 유시민은 차가운 구치소 바닥에서 글을 써내려갔다. 한 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됐다. 자신에 대한 판결이 부당하다는 호소문, 오타가 났다고 두 줄 그어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차디찬 방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펜을 들어 재판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14시간을 쉼없이 썼다. 단 한 번의 퇴고도 없었다. 그것이 바로 전설이 된 항소이유서다.

   

 유시민은 9tvN ‘알쓸신잡에서 구치소에서 항소이유서의 뒷 이야기를 전했다그는 1984년 서울대 학원 프락치 사건 주모자로 몰렸고,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유시민은 서울형사지방법원 항소 제5부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했다. 200자 원고지 100장 분량이었다. 그리고 이는 항소이유서의 전설이 됐다. 판사들이 돌려볼 정도였다.

 

그는 그 때가 26세였다. 누굴 때린 적도 없는데 폭력범으로 몰렸다면서 변호사님이 항소이유서를 각자 써보면 어떠냐고해서 내가 쓰겠다고 했다며 배경을 전했다. 유시민이 항소이유서를 쓰는 데 걸린 시간은 14시간. “감옥에 누워 첫 문장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문장을 머릿속에 넣었다면서 순수하게 14시간을 썼다. 퇴고는 안했다고 말했다.

 

항소이유서는 3부를 만든다. 종이 4장 사이에 먹지 3장을 깔고 안나오는 볼펜으로 눌러쓴다. 그 중 1부는 교도소, 1부는 법원, 나머지 1부는 검찰청에 보내진다. 유시민은 변호사님이 혼자 읽기 아깝다며 큰 누나를 불러 읽어보라고 권유했다. 그게 복사에 복사가 돼 퍼져나갔다며 항소이유서가 전설이 된 과정을 전했다. 그는 나중에 출소하니 학교 선배들이 글 쓰는 일을 시키더라. 그 때 글을 써서 밥벌어 먹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며 이후의 일화도 보탰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주요부분 발췌)

 

 

항소이유서

본 적 : 경상북도 월성군 내남면 망성동 163

주 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 1동 한양아파트 111107

성 명 : 류 시 민 생년월일 : 1959728

죄 명 :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요지

 

 

본 피고인은 198541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징역 16월을 선고 받고 이에 불복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합니다. 다 음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형량의 과중함을 호소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생략...)

 

 현정권의 핵심부분이 견고히 형성되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19791212일의 군사쿠데타 이후 상황만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경제적 모순사회적 갈등정치적 비리문화적 타락은 모두가 지난 날의 유신독재 아래에서 배태발전하여 현정권 하에서 더욱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들입니다. 현정권은 유신독재의 마수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와 민주회복을 낙관하고 있던 온국민의 희망을 군화발로 짓밟고, 517 폭거에 항의하는 광주시민을 국민이 낸 세금과 방위성금으로 무장한 국민의 군대를 사용하여 무차별 학살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피묻은 권력입니다.

 

 현정권은 정식출범조차 하기 전에 도덕적으로는 이미 파산한 권력입니다. 현정권이 말하는 새시대, 노골적야수적인 유신독재헌법에 온갖 화려한 색깔의 분칠을 함으로써 그리고 총칼의 위협아래 국민에게 강요함으로써 겨우 형식적 합법성이나마 취할 수 있었던 새로운 유신시대이며, 그들이 말하는 정의(正義)’란 소수군부세력의 강권통치를 의미하며, 그들이 옹호하는 복지란 독점재벌을 비롯한 있는 자의 쾌락을 뜻하는 말입니다.

    

 국가는 그것이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만이 구성원 모두에게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지난 수년간,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요구하며 투쟁한 노동운동가, 하느님의 나라를 이땅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양심적 종교인, 진실과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한 언론인과 교수들, 그리고 민주제도의 회복을 갈망해온 민주정치인들의 선봉에 섰던 젊은 대학인들은, 부도덕하고 폭력적이며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국민이 자유롭게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조건 아래서라면 단 한주일도 유지될 수 없는 현 군사독재정권이 그토록 존귀한 우리 조국의 대리인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 국민은 보다 민주적인 정부를 가질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정권은 1212 군사쿠데타 이후 4년동안 무려 1,300여명의 학생을 각종 죄목으로 구속하였고 1,400여명을 제적시키는 한편 최소한 500명 이상을 강제징집하여 경찰서 유치장에서 바로 병영으로 끌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정 구석구석에 감시초소를 세우고 사복형사를 상주시키는 동시에 그것도 모자라 교직원까지 시위진압대로 동원하는 미증유의 학원탄압을 자행하였습니다.

 

  (...생략...)

 

 그래서 본 피고인은 양심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이 사건에서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어느 사건에서도 그랬습니다.

 

  (...생략...)

 

 본 피고인은 결코 학생들의 행위 전부에 대한 무죄선고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부도덕한 자에 대한 도덕적 경고와 아울러 법을 어긴 자에 대한 법적 제재가 가해져야 하며, 허위선전에 파묻힌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 사태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우리 모두의 도덕적 향상은 기대될 수 없는 것을 주장할 따름입니다. 법정이 신성한 것은 그것이 법정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며, 그곳에서만은 허위의 아름다운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때로는 추악해 보일지라도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사법부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正義)를 세우며, 또 그 정의가 강자(强者)의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1심의 재판과정에서 매장당한 진실이 다시금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 피고인은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쉽게 허물어버리기 어려울 만큼 높아져 있는 현재의 불신과 적대감의 장벽 위에 분노의 가시넝쿨이 또 더하여지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고, 언젠가는 더욱 격렬한 형태로 폭발할 유사한 사태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5년간 현정권에 반대했다 하여 온갖 죄목으로 투옥되었던 1,500여명의 양심수 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신성한 법정에서 정의로운 재판관들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야수적인 유신독재 치하에서도 역시 그만큼 많은 분들이 전대미문의 악법 긴급조치를 지키지 않았다 하여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긴급조치 위반사건의 보도 또한 긴급조치 위반이었으므로 아무도 그 일을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변론을 하던 변호사도 그 변론 때문에 구속당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긴급조치가 정의로운 법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리고 그때 투옥되신 분들이 반사회적 불순분자또는 이적행위자였다고 말하는 이도 거의 없지만, 그분들을 죄수로 만든 법정은 지금도 여전히 신성하다고 하며 그분들을 기소하고 그분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검찰과 법관들 역시 정의구현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외면해 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법정이 민주주의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세워왔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가 진정 진지한 인간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정의란 독재자의 의지이다고 굳게 믿는 인간일 것입니다.

 

 (...생략...)

 

 이상의 논의에 기초하여 본 피고인은 1심판결에 승복할 수 없는 이유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본 피고인은 판결문을 받아보았을 때 참으로 서글픈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려 7회에 걸쳐 진행된 심리과정에서 밝혀진 사건의 내용과 거의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략...)

 

 따라서 본 피고인이 그토록 진지하게 임했던 재판의 전과정이 단지 예정된 판결을 그럴듯하게 장식해주기 위해 치루어진 무가치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따뜻한 축복의 말만을 들을 수 있었던 그때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 신입생이던 본 피고인은 유신 체제라는 말에 피와 감옥의 냄새가 섞여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유신만이 살길이다고 하신 사회 선생님의 말씀이 거짓말일 수도 없었으니까요, 오늘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했으며,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 설레던 미래는 오로지 장밋빛 희망 속에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달래는 벌써 시들었지만 아직 아카시아 꽃은 피기 전인 5월 어느 날,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푸르러만 가던 교정에서, 처음 맛보는 매운 최루 가스와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오던 눈물 너머로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던 여리디 여린 여학생의 모습을, 학생 회관의 후미진 구석에 숨어서 겁에 질린 가슴을 움켜쥔 채 보았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모든 사물이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숙사 입구 전망대 아래에 교내 상주하던 전투 경찰들이 날마다 야구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만 하얗게 벗겨져 있던 잔디밭의 흉한 모습은 생각날 적마다 저릿해지는 가슴속 묵은 상처로 자리잡았습니다.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맥주를 마시다가도, 예쁜 여학생과 고고 미팅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다 문제 학생이 될 조짐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겨울, 사랑하는 선배들이 신성한 법정에서 죄수가 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는 자신이 법복 입고 높다란 자리에 않아 있는 모습을 꽤나 심각한 고민 끝에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해 여름 본 피고인은 경제학과 대표로 선출됨으로써 드디어 문제 학생임을 학교 당국 및 수사 기관으로부터 공인받았고 시위가 있을 때면 앞장서서 돌멩이를 던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점증하는 민중의 반독재 투쟁에 겁먹은 유신정권이 내분으로 붕괴해 버린 1026정변 이후에는, 악몽 같았던 2년간의 유신 치하 대학 생활을 청산하고자 총학생회 부활 운동에 참여하여 19803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 봄의 투쟁이 좌절된 517, 본 피고인은 갑작스러이 구속 학생이 되었고, ‘교수와 신부를 때려준 일을 자랑삼는 대통령 경호실 소속 헌병들과, 후일 부산에서 김근조 씨 고문 살해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치안 본부 특수 수사관들로부터 두 달 동안의 모진 시달림을 받은 다음, 김대중 씨가 각 대학 학생회장에게 자금을 나누어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속 석 달 만에 영문도 모른 채 군법 회의 공소 기각 결정으로 석방되었지만, 며칠 후에 신체 검사를 받자마자 불과 40시간 만에 변칙 입대당함으로써 이번에는 강집 학생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입영 전야에 낯선 고장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이면서 본 피고인은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요 치욕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 제대하던 날까지 32개월 하루동안 본 피고인은 특변자(특수 학적 변동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늘 감시의 대상으로서 최전방 말단 소총 중대의 소총수를 제외한 일체의 보직으로부터 차단당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하 20도의 혹한과 비정하게 산허리를 갈라지른 철책과 밤하늘의 별만을 벗삼는 생활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인 그해 저물녘, 당시 이등병이던 본 피고인은 대학시절 벗들이 관계한 유인물 사건에 연루되어 1개월 동안 서울 보안사 분실과 지역 보안 부대를 전전하고 대학 생활 전반에 대한 상세한 재조사를 받은 끝에 자신의 사상이 좌경되었다는, 마음에도 없는 반성문을 쓴 다음에야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다른 연대로 전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민족 분단의 비극의 현장인 중동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그것도 최말단 소총 중대라는 우리 군대의 기간 부대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음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기며 남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병사였음을 자부합니다.

그런데 제대 불과 두 달 앞둔 19833월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세상을 놀라게 한 녹화 사업또는 관제 프락치 공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벗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태의 억압이 수백 특변자들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당시 현역 군인이던 본 피고인은 보안 부대의 공포감을 이겨 내지 못하여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타협책으로써 일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는 있었지만 그로 인한 양심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군사 독재정권의 폭력 탄압에 대한 공포감에 짓눌려 지내던 본 피고인에게 삶과 투쟁을 향한 새로운 의지를 되살려준 것은 본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강제 징집당한 학우들 중 6명이 녹화 사업과 관련하여 잇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생략...)

 

  그러나 본 피고인은 지금도 자신의 손이 결코 폭력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자신이 변함없이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늙으신 어머니께서 아들의 고난을 슬퍼하며 을씨년스러운 법정 한 귀퉁이에서, 기다란 구치소의 담장 아래서 눈물짓고 계신다는 단 하나 가슴 아픈 일을 제외하면 몸은 0.7평의 독방에 갇혀 있지만 본 피고인의 마음은 늘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지난 7년간 거쳐온 삶의 여정은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학생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시대의 모든 양심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정통성도 효율성도 갖지 못한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민주 제도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 운동이야말로 가위눌린 민중의 혼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 종소리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오늘은 군사 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한 위대한 광주 민중 항재의 횃불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날이며, 벗이요 동지인 고 김태훈 열사가 아크로폴리스의 잿빛 계단을 순결한 피로 적신 채 꽃잎처럼 떨어져 간 바로 그날이며, 번뇌에 허덕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이 성스러운 날에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바치고 가신 숱한 넋들을 기리면서 작으나마 정성들여 적은 이 글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을 기원해 봅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 것 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1985527일 성명 류 시 민

 

서울 형사 지방 법원 항소 제5부 재판장님 귀하

 

  * 독자생각

 

    위 글을 편집하면서 글자를 진하게 한 부분이나 글자색을 푸른색으로 한 것은 

    본 블로그 운영자 임의로 작성한 것이며 상소이유서의 많은 명문장 중에서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발췌한 것은 독자들이 이 문장이라도 정독하였으

    하는 생각에서 입니다.

 

    유시민 작가님! 훌륭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