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상처받고 사랑하라, 두려움 없이

송담(松潭) 2006. 12. 16. 11:31
 

 

 

상처받고 사랑하라, 두려움 없이



국화차 한잔을 만들어 창가에 섰습니다. 드물게 환한 겹겹의 분홍빛… 한참 찾았던 어느 기억처럼 진분홍에서 아주 연한 분홍까지, 온몸의 진물 터뜨린 자리가 꽃자리처럼 선연한 노을 아래입니다. 한 해가 저뭅니다. 또 한 해가 간다는 사실이 막막하고도 긴 상념을 자아올립니다. 한 해의 마지막과 하루의 저물녘 사이엔 마치 현생이 아닌 듯 느껴지는 착란과 몽환의 시간이 간혹 섞여 듭니다. 오늘은 그 시간 속, 지는 노을 밑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심상한 목소리로 불빛 얘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엊저녁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지상으로 막 나오는데 저만치 보이는 아파트 불빛들이 너무 따뜻해 보이더래요. 무수한 별처럼 총총히 박혀 있는 수많은 층층의 불빛들을 바라보자 갑자기 마음이 놓이더래요. 아, 나만 외로운 게 아닌가보다… 싶더래요. 나는 그 친구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가만히 물어 보았어요. 내가 갈까? 친구는 한참 만에 코맹맹이 소리로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괜찮다고. 나는 좀 쉬라고 말해주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어요.

 

그리고 얼마 후 친구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어요. 있잖니… 다 부숴버릴 거야! 응, 그렇게 해. 있잖니… 다 바꿔버릴 거라구! 응, 그렇게 해. 있잖니, 나 견딜 수 있어! 응, 그럼. 있잖니… 다 바꿔버릴 거라구! 응, 그래. 친구는 취해 있었고 전화는 끊어졌어요. 내가 알고 있는 친구의 주량이라면 수화기를 내려놓은 채 단정하게 옆으로 곱송그린 채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을 거예요.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몹시 과격한 어조로 부숴버린다는 둥 바꿔버린다는 둥 소리 높여 떠드는 친구가 이상하게도 나는 안심이 되었어요. 오늘밤은 잘 자겠구나, 생각했지요.


 그리고 갑자기 사람들이 떠올랐어요.

울고 싶을 때 있지요. 한 해가 저무는 이런 즈음에 울고 싶다면 그 아픔과 외로움은 더하겠지요.

이 들녘에서 엎드려 울게/날 좀 내버려둬”라고 읊은 로르카는 스페인 최고의 시인이지요. 삼나무 그림자가 바람에 날리고 모닥불이 탈 때 어두워지는 들판에 엎드려 울고 싶을 뿐인 시인이 외칩니다. 날 좀 제발 내버려두라고. 울고 싶은 이유를 쉽게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외롭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외롭다는 게 정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외로움이 주는 음식들, 그 영혼의 음식들은 종종 성찬입니다. 정도의 문제이겠지만 가난과 질병과 마음의 상처가 주는 외로움은 삶을 컨트롤하는 데 필요한 약입니다.

가난을 모르고 질병을 모르고 상처를 모르는 생들이 그 풍족함에 길들여져 오히려 감사를 잊고 천박해지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되지요.

고독을 영접하고 잘 대접하는 일도 삶이니 당신에게 고독을 주세요. 내게 필요한 것은 내가 주어야 합니다.


 여기저기 구직광고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사랑을 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계단 많은 비탈을 한참이나 오르며 집으로 가는 샐러리맨이 사랑을 합니다.

술에 취해 집 앞에서 흐트러진 옷자락을 주섬주섬 집어넣는 사람들이 사랑을 합니다.

영문도 모른 채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과 억울하게 재판에서 진 사람들이 사랑을 합니다.

예수나 부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합니다.


 아파도 사랑하세요. 아프고 아름다워서 사랑입니다.

어느 순간, 아픔까지도 곁눈질할 틈이 없는 황홀한 생의 열기라는 걸 알게 되어 당신을 더욱 사랑합니다. 선사들은 몸에 병이 들어오면 마음을 활짝 열어 병을 내보낸다지요. 마음에 병이 들어오면 몸을 활짝 열어 병과 놀아주고 앓아주고 달래주다가 내보낸다지요.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아플 수 있게 우리는 진화해 왔답니다.

오 계절이여, 오 성곽이여! 결함 없는 넋이 어디 있으리?”라고 랭보가 말했던가요? 그래요,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겠어요?


 까치밥이란 게 있지 않아요? 새들이 쪼아 먹은 감이나 배, 사과 같은 것들. 쪼아 먹힌 과일들이 훨씬 맛있다는 얘기에 골똘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려서는 새들이 맛있는 과일을 어떻게 용케 알고 찾아내는 걸까? 라고 신기해했지만 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고 해요.

새가 과일에 상처를 내면 상처를 회복하려는 나무의 열심에 의해 상처 난 과일에 더 많은 영양분이 공급되고 그래서 쪼아 먹힌 과일이 더 윤택해지고 맛있어진다는 거였어요.

 

 그러니 두려워 마세요. 상처를 가지고 사랑하면서 가는 겁니다. 당신을 사랑해서 비로소 나를 사랑하게 된 저녁 5시,

당신의 사랑이 넉넉해져 누군가를 감싸면서도 또 다른 사랑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사랑은 배반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가 되어요.

 

사랑은 자꾸 파문 짓고 파장이 됩니다.

“사랑해”라는 당신의 말 한마디를 등불 삼아

오래 아픈 누군가

몸과 영혼의 신비로운 긴 여정에 오릅니다.

누가 할 일이 무어냐고 물으면

당신과 함께 밝힌 촛불을 들고 “사랑”이라고 말하렵니다.

 

 

 

 


 한 해가 저뭅니다. 오, 오오 이런!

“인생 뭐 별거 있겠어요? 잘 될 때까지 사랑하는 일밖에”라는 편지를 내게 보내준 사람이 있었지요. 나무가 없는 아주 작은 무인도에 배를 타고 들어가 소나무 한그루를 심고 나온 그 사람의 해안에 지금 동백이 불을 밝히려 들겠네요.


김선우/시인  (2006.12.15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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