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Desire)
이성적 사유를 중심으로 했던 고대 철학에서도, 신학이 철학과 거의 동일시된 중세에도,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나뉘어 인식론적 논쟁이 활발했던 근대에도 욕망은 항상 철학의 초점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쾌락주의로 유명한 그리스의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도 욕망과는 거리가 먼 정신적 행복이며 고통을 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소극적 쾌락이었다.
특히 합리론자들은 욕망을 부정적으로 느꼈으며,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마땅한 인간의 속성으로 보았다. 인간의 자유를 크게 신장시킨 사회계약론에서도 사회가 존속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욕망이 합리적으로 제어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합리론을 완성시킨 칸트 역시 욕망에서 나온 행동은 자유로울 수 없고 오로지 이성에서 비롯된 행동만이 자유를 가져다준다고 말했다. 이렇게 전통적으로 푸대접을 받아온 욕망이 철학의 주요한 테마로 떠오른 것은 현대에 이르러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의식이 자체 근거를 갖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욕망의 개념을 도입한다. 의식 안에 텅 빈 무(無)의 상태, 즉 결핍으로 존재하므로 항상 뭔가를 채워 넣고자 한다.(욕망을 결핍으로 보는 것은 플라톤 이래 전통 철학의 맥락과 통한다.) 인간의 의식은 늘 욕망으로 존재한다. 목이 마를 때는 갈증으로서, 연인이 그리울 때는 그리움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것으로도 자신의 존재 근거를 대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식의 기도는 결국 실패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욕망해야 하는 것이 인간존재의 숙명이다.
반이성주의를 기치로 내건 구조주의에서는 욕망을 의식의 속성이 아닌 무의식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욕망은 갈증이나 배고픔 같은 ‘욕구’와 다르며, 욕망의 의식적 표현인 ‘요구’와도 다르다. 프랑스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욕망을 결핍으로 보는 전통을 수용하지만 그냥 결핍이 아니라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존재의 결핍으로 본다. 이 결핍을 매우기 위해 적절한 대상을 찾지만 늘 일시적인 만족만 얻을 뿐 근본적인 결핍을 해소하지 못한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인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결핍으로 보지 않고 생산적인 개념으로 보는 획기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욕망은 부족한 것을 메우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생산하고 창조하려는 무의식적 의지다. 욕망하는 생산은 관념적인 생산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과 관련된다. 욕망은 특정한 개인의 속성이나 의지도 아니고 심리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욕망은 사회적 관계 전체에 투영되어 기존의 정치경제적 과정을 대체한다.
욕망을 결핍으로 보든 무의식적인 생산의 힘으로 보든 20세기 철학에서는 더 이상 욕망을 방치하거나 백안시하지 않는다.
욕망이란 부도덕한 것도 아니고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욕망은 그저 물처럼 흐를 뿐이다.
물길을 막으면 홍수가 나듯이 욕망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차단하려 하면 갇힌 욕망은 결국 한꺼번에 터져버린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흐름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포획하려는 자본주의적 장치로부터의 탈주하는 것을 참된 의미의 혁명이라고 본다.
남경태/개념어 사전에서(내용발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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