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생각들
< 1 >
오만 / 편견
인지심리학자들은 편견을 효율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방법이라고 본다. 첫인상이나 외모, 성별, 출신 등을 근거로 어떤 사람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것을 편견이라 한다.
결국 편견은 사람을 판단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요약한 것이다.
우리가 평생 만나야 하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누군가와 본격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기 전에 저 사람이 위험한 사람인지 아니면 함께 일해도 되는 사람인지를 가려내지 못한다면, 우리가 제대로 생존할 수 있을까?
편견은 우리가 효율적으로 생각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생존의 수단이다. 더 중요한 문제도 있다. 우리는 평생을 사귀어도 상대를 완전히 할 수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타인에 대한 판단은 어느 정도 편견이란 얘기다.
오만은 어떨까. 건강한 정신의 필수요소가 오만이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자가당착 속에서 산다.
내가 이 세상에서 뭔가 중요한 존재라고 믿을 수 있어야 살아갈 힘이 생긴다.
반면 우울증 환자들은 오만함이 없어서 자기를 있는 그대로 본다. 다시 말해, 인간은 어느 정도는 오만해야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정신 건강을 유지하며 살 수 있다.
그러니 오만과 편견은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고로 오만과 편견을 버리려고 애쓸 게 아니라,
좀 더 타당한 근거에 기반한 오만과 편견을 소유해야 한다.
(장근영/심리학자)
< 2 >
기쁨 / 쾌락
기쁨과 쾌락은 그 차이를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건 우리가 ‘기쁨없는 쾌락’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쾌락은 감각적인 것이라 할 수 있고 기쁨은 정신적인 만족까지
채워지는 더 차원 높은 것이다.
우리는 기쁨이 없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보다 흥분을 일으키는
갖가지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성교후의 동물은 슬프다”라는 속담은 쾌락적인 ‘절정경험’을 말해 준다. 성교의 기쁨은 육체적인 정을 통함과 동시에 사랑으로
정을 통할 때만 경험되는 것이다.
기쁨은 한 순간 황홀경의 불꽃이 아니라,
불꽃 없이 타오르는 빛이다.
< 3 >
죽음에 대한 두려움 / 삶의 확인
우리가 재산에 집착하지 않고, 따라서 재산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 자체를 잃어 버리는 데 대한 두려움,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어떤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얼핏 보이는 것과는 달리 삶의 멈춤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들과 상관없다. 왜냐하면 에피쿠루스가 말한대로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동안은 죽음은 아직 여기 있지 않으며,
죽음이 여기 있을 때에는 우리는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부질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약 삶이 소유로 경험된다면 그렇지 않다.
그때는 두려움이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음’에 대한 것이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현명한 사람은 삶에 대해 생각하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법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가르침은 사실상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과 마찬가지다.
모든 형태의 소유에의 갈망, 특히 그 중에서도 자아집착을 많이 버릴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만큼 약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김용준/프롬의 소유냐 삶이냐 평설中)
< 4 >
죽는게 뭔지 아십니까
「죽는게 뭔지 아십니까. 숨 한 번 내쉬었다가 그 숨 한 번 다시 들여 쉬지 못하면 죽는 겁니다.」하고 어느 날 작은 모임에서 한 대학교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질문에 어떤 사람은 「죽는 것은 숨이 떨어지는 것」이라느니 또 어떤 이는 「밥숟가락 놓는 것」이라느니 했고 이외에도 여러 가지 답을 내놓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교수의 해답만큼 가슴을 울리는 말은 없었다.
죽음과 삶의 거리가 이토록 가깝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백지 한 장 차이란 말인가. 그래서 옛날 선사(禪師)들은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생사일여(生死一如)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범부중생의
죽음에는 모든 것이 단절과 허무함만이 따르게 된다.
우리는 늘 과열된 생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러한 일들을 아득히 잊고 살아간다. 지칠 줄 모르는 투혼을 불태워 가면서.
그러다가 어느 날 나의 곁에 있는 의지하고 믿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과 인생살이의 무상함에 새삼스러이 괴로워한다.
우리 불가에는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滅
浮雲自體本無 生死去來亦如然」이란 법구가 있다.
삶은 어디에서 비롯되어 온 것이며
죽음은 어디로 향해 가는 것이냐.
삶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생겨나는 것이며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뜬구름 자체는 본래 實이 없나니
생사의 오고 감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이토록 뜬구름 같은 인생살이 이건만 사람들은 왜 그토록 무섭게 집착하는 것일까.
먹고 입을 것을 가졌으면서도 좀더 많이 가지려고 혈안이 되고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남의 것을 빼앗고 짓밟으며 소름끼치는 음모와 독사 같은 살기로 자기이익에 배반되는 상대를 살인까지 쉽게 저지르는 우리사회는 분명 법화경에서 이르는 화택(火宅)인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며 치부일진데 우리는 애써 빨리 이 불난 집을 탈출해야만 한다.
부처님께서는 「물질의 탐착을 떠나 올바른 생업의 수단으로 금면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평화와 안녕을 누릴 수 있다.」고 하셨다.
우리는 언제나 나의 인생의 끝마침을 생각하며 정직하고 화합된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내것이 어디있나. 사용하다 버리고 갈 뿐이다.」
천태종 重創祖이신 상월 大祖師의 말씀이다.
김도원 /(전) 천태종 총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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