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잔 할까,
너와 나의 경계에
꽃이 핀다
우리는 종종 일탈을 꿈꾼다. 때로는 실제로 벗어나 보기도 한다. 돌아온 탕아가 그러하듯 틀에 박힌 일상을 벗어던져 봐야만 새롭게 거듭난 모습으로 일상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진부함에 함몰되기 쉽다.
시인과 예술가들에게는 상상력이란 일탈의 날개가 있다. 누워서도 푸른 바다 그 깊은 곳을 항해할 수 있다. 골방에 앉아 우주 저편의 속삭임도 들을 수 있다. 천재들은 흔들리지 않고도 넘친다. 넘쳐흐름으로써 온 강과 들녘의 온갖 푸르른 향기를 숨쉴 수 있다. 그런 비상의 날개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다 해도 쉽게 펼치질 못한다. 일상 규범의 부릅뜬 눈 때문이다. 다른 힘을 빌리지 않으면 흔들릴 수도 넘쳐흐를 수도 없다. 그래서 술의 도움이 필요하다. 벗어나기 위해. 크게 한번 흔들려보기 위해.
술은 신의 음식이다. 추수 감사의 제사를 위해 빚기 시작했다. 그 신들이 마시고 난 다음에야 우리는 경건하게 음복을 한다. 그 기운을 빌려 신과 소통하고 하나가 된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반복되면서 음주문화가 탄생했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소통은 필요하다.
일상적 거래가 아닌 본질적 존재의 나눔을 위해서도 일상의 의례들을 벗어던지고 진부한 도덕률에서도 해방되어야 한다.
그래야 존재 내면의 부드러운 속살을 공유할 수 있다.
신에게 바치는 술은 용수를 박아 맑게 뜨지만 사람들끼리 나눠 마시는 술은 막 흔들어 거른다. 그렇게 막걸리가 태어난다.
추운 북쪽 지방 사람들에게는 좀더 화끈한 일탈의 수단이 간절했을 것이다. 이들이 전해준 술이 고아 내린 증류식 소주(燒酒)다. 그 제조 방법이 쉽지 않아 사대부 집에서만 마실 수 있었다. 막걸리가 일상화하면서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꿈꾸는 대중들의 소주에 대한 열망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공장에서 만드는 희석식 소주는 그렇게 우리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막걸리 한잔 하고 가세요!” 논두렁에서 부르는 소리나 “언제 소주 한잔 합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막걸리와 소주는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일탈과 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인이 박여버린 것이다.
“황금빛깔의 용”을 만들어내는 “대단한 요구르트”라며 막걸리를 거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처럼 명태를 안주 삼아 소주를 ‘카!’ 하고 즐기는 이도 있다. 흔히 맑은 술은 성인에, 탁한 술은 현인에 견주지만 성현이 아니니 굳이 청탁을 가릴 일은 아니리라.
(...중략 ...)
술은 바람이다. 예술가에게 상상력이 영감의 바람이듯, 일상의 진부함을 털어버리게 해주는 혁신의 바람이다.
막걸리가 이른 봄 수액이 잘 오르도록 나무줄기와 가지들을 흔들어주는 바람이라면, 소주는 썩은 가지들을 부러뜨리고 부실한 열매들을 털어내 남은 것들을 실하게 해주는 태풍에 비할 수 있다.
가을바람이 죽은 나뭇잎과 씨앗들을 겨울의 침상으로 몰고 가듯 망가짐(죽음)이 있어야 거듭날 수 있다.
디오니소스적 열정에 의한 흐트러짐이 없었다면 위대한 인류 문화유산인 희랍 비극의 탄생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몸 순환기 상태를 점검하는 데도 술처럼 요긴한 것이 없다. 그 방어 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라도 민방공훈련 하듯 가끔은 술로 비상을 걸 필요가 있다.
고은 시인의 말처럼 막걸리나 소주로
“몸에 혁명적 타격”을 가하여 가끔 “속을 한번 바꿔주는” 것이 정신건강은 물론 몸에도 좋지 않을까.
이종민/전북대 교수
(2006.11.01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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