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송담(松潭) 2006. 11. 25. 14:43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한 번 이렇게 생각해보시지요. 만일 한 사람이 어린 왕자처럼 어떤 별에 혼자 떨어졌다고 가정합시다. 그가 오기 전에 이 별은 흙과 돌멩이들만이 있는 ‘사물의 세계’ 즉 '그것(it)'들만이 존재하는 3인칭의 세계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도착하고 난 다음부터 그곳은 ‘나(I)와 그것(it)'들이 존재하는 1인칭과 3인칭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그곳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때문에 아직 아무런 의미와 가치도 없는 세계이지요. 하지만 그 사람이 그 별에 있는 어떤 돌멩이 하나라도 좋아하여 그 돌멩이에게 ‘너’ 또는 ‘그대(You)’라고 부르는 관계를 맺는다면, 그곳은 비로소 2인칭의 세계, 곧 의미와 가치의 세계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그대(You)’라고 부르는 2인칭이란 매우 특별한 인칭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원래는 ‘나’라는 1인칭과 ‘그’. ‘그녀’ 또는 ‘그것’이라는 3인칭만으로 구성되어 있었지요. 그러나 이러한 세계, 곧 나에게 그와 그녀는 타자의 세계이고, 그와 그녀에게 나 역시 3인칭 타자의 세계에서는

나는 그와 그녀에게 또한 그와 그녀는 나에게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만일 지옥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곧 타인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곧바로 떠오르는 세계이지요.


 모든 3인칭 대상들은 나에게 파악될 뿐 응답하지도 않고 나를 배려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에게 ‘그’는 그리고 ‘그’에게 ‘나’는 사실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이나 같지요. 이런 세계는 ‘사물의 세계’이자 ‘무의미의 세계’인 겁니다. 동시에 인간에게는 지옥이지요.


 하지만 1인칭인 ‘나’가 3인칭인 ‘그’나 ‘그녀’와 어떤 관계를 맺을 때, 드디어 ‘그대’라는 2인칭이 기적과 같이 탄생하지요.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서로 ‘그대’라고 부르는 관계가 탄생합니다. 그리고 비로소 서로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응답하며 배려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사물들의 세계’에서 ‘의미와 가치의 세계’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2인칭 대화의 상대인 ‘나와 그대’, 곧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 안에서, 달리 표현하면 사랑의 관계 안에서만 모든 것은 그것의 의미와 가치가 비로소 기적처럼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즉, ‘나’가 있어 ‘우리’의 존재에 의미와 가치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있어 ‘나’의 존재에 의미와 가치가 생긴다는 말이죠.


 사랑하는 우리가 없다면 어떻게 사랑하는 또는 사랑받는 ‘나’가 있을 수 있을까요. 가정이라는 ‘우리’가 없다면 어떻게 남편이라는 또는 아빠라는 ‘나’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생길까요? 그래서 사물의 세계에서는 내가 있어 우리가 있는 것이지만, 의미와 가치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말을 부버는 <나와 너>에서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고 표현했지요.

 

우리는 만났지만 우리가 만났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제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나-그것’의 관계로 만났지만 ‘나-너’의 관계로 만나지 않았다는 거지요. 그래서 도시가 언제나 사막과 같고, 우리가 언제나 외로웠다는 것이지요. 어린 왕자가 말하는 ‘길들이는 것’, 부버가 말하는 ‘나-너’의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하는 것. 이것만이 도시라는 사막에서 샘을 터뜨리고 외로움이라는 악령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세상을 세상답게 한다는 거지요. 인간과 세계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드러나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누구든 사막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어떤 것을 길들이라는 거지요. 어떤 것과 ‘나-너’의 관계를 맺으라는 겁니다. 어떤 것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같은 말을 어린왕자는 이렇게 했지요.


“내가 어느 별에 있는 그 꽃을 좋아하게 되면, 밤에 하늘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달콤해지지요. 어느 별이든 꽃은 피어 있으니까요.(...)

밤에 별들을 쳐다보세요.(...) 사람들은 다 별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사람마다 별이 주는 의미는 다르죠.(...) 아저씨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별을 갖게 될 게예요.(...) 내가 별들 중 하나에 살고 있을 테니까요.

 

내가 그 별들 중 하나에서 웃고 있을 거예요. 그러면 아저씨가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볼 때마다 별들이 웃는 것처럼 보이겠죠....

단지 아저씨만이 웃을 수 있는 별들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요.

 

그리고 아저씨의 슬픔이 사라지게 되면 나와 함께 웃고 싶어질 거예요.

그리고 그런 즐거움을 얻기 위해 창문을 열어둘 거예요.”

 


김용규/“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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