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길
- 어린 왕자에게 배운다 -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가장 심오하고 지혜로운 주인공이 아마도 여우일 것이다. 그가 어린 왕자와 헤어지며 주는 말은 이러하다. "잘 가거라. 내 비밀을 일러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눈'이라는 표현은 성경에도 그대로 나오는데(에페 1, 18), 도대체 마음의 눈으로 본다 함이 구체적으로 무슨 말인가. 여우는 대략 이렇게 설명한다. "네 머리칼은 금빛깔이지. 그러니까 네가 나를 길들여 놓으면 참 기막힐 거란 말이야. 금빛깔이 도는 밀을 보면 네 생각이 날 테니까. 그리고 나는 밀밭으로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좋아지겠지."
어린 왕자가 '길들인' 여우에게 밀밭은 더 이상 예전의 밀밭이 아니다. 저물녘, 부드러운 바람에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밀밭은 어린 왕자의 같은 색깔 머리결을 떠올리게 하며, 그렇게 어린 왕자의 현존을 선사해 준다.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의 귀로 들으면, 밀밭은 예전에 하지 않던 말을 하고 예전에 부르지 않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결국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말은
너와 내가 맺은 관계를 통해, 사랑을 통해 모든 것을 본다는 뜻이다. 그러면 모든 것은 새로운 의미로 빛나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옛날 교부들도 말씀하셨다. "사랑이 있는 곳에 눈이 있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해 주는 마지막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대목에서다. "장미꽃들을 다시 봐라. 네 장미꽃 같은 것이 세상에 둘도 없음을 알게 될 거다. 네가 네 장미꽃을 위해 허비한 시간 때문에(그리고 오직 그 때문에만!) 네 장미꽃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이야."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께서 자주 하셨다는 말씀도 여기서 다시 떠올리게 된다. "위대한 사랑의 행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위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행하는 사소한 행위들이 있을 따름이다."
선문(禪門)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있다. 젊은 구도자들이 큰스님께 공부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절실한 의문들에 관해 질문하는데, 스승이란 화상의 대답은 딱 한 가지였다는 것이다.
다상(茶床) 위에 놓인 차에 차 한 잔 따라 건네며
"차나 한 잔 하시게."
그래 손님 다 가고 난 저물녘, 상좌 스님이 안 된 마음에 조심스레 여쭙는다.
"큰스님, 그렇게 오는 손님한테마다 '차나 한 잔 하시게' 하시니 딱하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상좌에게도 주시는 큰스님 한 말씀이
"자네도, 차나 한 잔 하시게."
이웃 종교에 전해져 오는 심오한 이야기에 주제넘게 주석을 달 처지는 전혀 아니지만, 하느님 말씀 문중에 수학한 밥값하는 셈으로 나름대로 풀이해 보자면 이러하다.
아마도 스승은 답답했을 것이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젊은 수행자들이 차 한 잔 마시는 지금 이 순간, 이곳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에. "자네와 나, 이렇게 지금 여기 앉아서 차 한 잔 나누는 이 순간 외에 진리가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자네와 나, 같이 차 한 잔 나누며 함께 하는
고요하고도 넉넉한, 맑고도 가슴 두근거리는 이 만남과
공존의 순간, 존재의 이 청정한 나눔, 우리 둘 마음 사이를 잔잔히 흐르는 만남의 이 신성한 물결… 이것을 놓치고 어디서 찾는고. 이 순간 이 자리보다 더 참된 것(진리)이 어디 있단 말인고. 아, 내가 외로우니 진리도 외롭구나."
얼마든지 엉터리일 수 있는 나의 이런 해석은 물론 "말씀은 네 가까이, 네 입과 네 마음속에 있다"(로마 10,8)는 성경 구절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멀리서 찾지 말라, 등잔 밑이 어둡다. 다 같은 소리 아닌가. 성녀 소화 데레사는, 옛날 성인들이 하던 엄한 고행(苦行) 같은 것을 왜 안하시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한다. "저같이 작은 사람은 엄두도 못낼 일입니다. 저는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일, 이런 작은 일을 통해 하느님께 갑니다." 모든 성인들이 마지막에 가면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 대목이다.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지 않은가.
'마음의 눈'으로 걷는 '마음의길'은 거창하고 큰 곳이 아니라 이렇듯 평범하고 작은 곳으로 나 있기에.
이연학/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장
(2007.1.27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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