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귀촌 후배들에게
가끔 귀농·귀촌 계획을 가진 분들의 연락을 받는다. 유행처럼 쏟아져 내려올 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자연인이다’까지는 자신이 없지만 ‘나 혼자 산다’ 정도는 해보고 싶은 딱 그 정도인 듯하다. 빈집도 찾고 내놓은 땅도 둘러보다가 차 한 잔 앞에 두고 살아온 내력을 털어놓는다. 듣다 보면 이후의 흐름과 결과를 짐작할 수 있다.
상담차 찾아오신 분들도 그렇고, 이곳 어르신들도 여전히 내게 물으신다. “여가 고향이요?” 아니라고 답한 이후 문답은 천편일률이다. 부모님 고향이 이짝이요? 아뇨, 두 분 다 경기도 분이세요. 구례에 친척이라도 있소? 아뇨, 서울에서만 살았어요. 그 전에 농사는 지어봤소? 아니요. 농촌활동 가본 게 다예요. 근디 왜 내려와서 이 고생을 허시까.
14년 전 이맘때 야반도주하듯 새벽 이삿짐을 싸서 내려왔다. 탈출이었다. 20대 후반 입사 첫날 훈련소 교관 같은 한 선배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을 듣고부터 떠날 결심을 했다. 절에는 문제가 없었다. 지가 ‘절’인 줄 아는 사람들과 떨어져 살고 싶었다. 내가 먹고살자고 하는 행위가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는 것을 알았고, 마음과 다른 표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다.
때가 덜 묻은 곳을 찾아 돌아다녔고 사는 동안 가장 무해한 일이 무얼까 생각했다. 10년 넘는 발품과 고민의 결과가 지금이다. 퍼즐처럼 꽉 들어찬 도시보다 여기저기 풀이 자랄 땅이 있어 좋고, 승자가 아니면 패자가 되어야 하는 조직문화가 없다. 연봉과 승용차 대신 부지런함과 인성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간혹 수입과 배움이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불쌍히 여기고 기회를 주려 하지 가난을 욕하거나 모자람을 손가락질하는 경우는 드물다.
내가 촌 생활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점은 뭔가를 잘 못해도 흉보지 않는 것이다. 농사일을 잘하지 못해서 수확이 적어도 나만 괜찮으면 그만이다. 안쓰러워하시고 도와주시려는 어르신들의 정은 덤이다. 귀농 후 지금까지 농사가 잘된 해는 없었다. 항상 남보다 수확이 적었고 수입도 그만큼이었다. 희한한 건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는 거다. 풍족하고 여유롭진 않았지만 쪼들리고 내몰리지 않는다.
수년 전 농사가 블루오션이라는 헛소리도 있었고, 아직도 지원금 저리 융자를 염두에 두고 내려오려는 사람들이 있다. 장담하건대 눈먼 돈은 촌에도 없다. 오히려 도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헛똑똑이라는 소리만 듣는다. 통장의 잔액보다 책장의 책을 보고 웃는 사람, 골프장의 그린보다 벼의 바람 물결이 흐뭇한 사람, 사우나에서 흘리는 땀보다 노동으로 젖은 몸이 뿌듯한 사람, 백화점 쇼핑보다 강변 산책이 좋은 사람이라면 내려올 만하다.
이런 일이 있었단다. 국내 기업 중 남미 공장에서 한 현지인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서 생산공정에 반영했고 원가를 극적으로 절감할 수 있었다. 회사에 큰 이익을 가져왔고 당연히 보상이 따랐다. 우리나라 책임자가 연봉 2배 인상을 얘기하니 해당 현지인은 조금 다르게 제안했다. “연봉은 그대로 두고 근무시간을 절반으로 줄여주시면 안 될까요?”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딱 내 생각이다.
원유헌 / 구례 사림마을 이장
(2025.7.21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