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칼럼, 정의

봄날의 봄볕

송담(松潭) 2025. 3. 27. 05:25

봄날의 봄볕

 

 

 

(...생략...)

 

봄이 오고 있다. 미세먼지로 탁한 봄 하늘을 눈곱 낀 듯 아스라한 시선으로 가만히 올려본다. 밝아진 햇빛이 겨울과는 분명히 다르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고재현 교수님의 책 <빛의 핵심>에 따르면, 태양 깊은 안쪽에서 출발한 빛은 100만년의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태양 표면에 도달한다. 이곳에서 빛은 빼꼼 고개를 내밀고, 곧 걸음을 재촉해 우주 공간을 빠르게 가로질러 지구의 대기를 통과한다. 전자기파인 빛은 내 얼굴에 닿아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흔쾌히 내놓고, 몸을 이루는 입자들의 마구잡이 열운동을 늘려 내 피부의 온도를 높인다. 바로 이때 빛이 볕이 된다.

 

보낸 것은 빛인데 닿고 보니 볕이 된 따사로운 봄볕에서, 빛이 볕이 된 100만년을 생각한다. 빛은 눈이 보고 볕은 몸이 본다. (...생략...)

 

사람도 빛을 낸다. 가시광선 영역이 아니어서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적외선 카메라로 보면 사람이 내는 빛을 볼 수 있다. 사람이 빛나는 이유는 몸의 온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따뜻한 것은 스스로 다양한 파장의 빛을 낸다. 사람 몸의 온기가 빛과 열로 퍼져나가고, 누군가에 닿으면 이것도 볕이 된다. 아무리 추워도 여럿이 함께 한자리에서 가까이 모이면 훈훈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다. 너는 빛을 보냈는데 내가 받고 보니 볕이 되는 놀라운 일이다. 차갑게 느껴지는 빛은 있어도 따뜻하지 않은 볕은 형용모순이다. 세상의 온기를 전하는 것은 빛이 아니라 볕이다.

 

봄이 왔는데 봄 같지 않은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봄빛은 완연한데 따스한 봄볕은 느껴지지 않는다. 해가 보내는 봄빛이야 1년을 주기로 규칙적으로 반복되니, 빛을 기준으로 하는 봄이 때맞춰 우리를 찾아오지 못할 도리는 없다. 빛을 볕으로 만드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우리라는 것을 떠올린다. 봄이 왔는데 봄 같지 않은 이유는 빛이 아니라 볕의 문제가 아닐까. 지난해 12월 초 시작한 한국 사회의 긴 겨울이 곧 끝나기를 바란다. 밝은 봄빛이 봄날의 따스한 봄볕이 되기를. 춘분을 훌쩍 넘겼는데도 아직도 오지 않은 봄볕이 곧 우리 모두를 찾아오길.

 

김범준 /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2025.3.27 경향신문)

 

< 2 >

 

기다림에 어울리는 말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탕웨이)는 남편이 살해된 사건의 담당 형사 해준(박해일)에게 이렇게 말한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봐.” 그는 남편의 죽음에 동요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곧장 용의 선상에 오르지만, 정작 관객들에게 오랫동안 남는 것은 다름 아닌 ‘마침내’라는 단어다. 서래가 한국말이 서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지, 사건의 종결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인지 알쏭달쏭하기 때문이다. 달성의 느낌이 강한 부사 ‘마침내’는 영화 내내 우리를 따라다닌다. 어찌 보면 만나는 일과 헤어지는 일 모두 ‘마침내’의 자장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만나는 일과 헤어지는 일의 앞뒤에 있는 것은 기다림이다. 만나기로 했다면 만날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 호감이 가는 사람과 만났다면, 헤어지고 난 뒤에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릴 것이다. 물론 헤어짐을 기다리는 이도 있을 테고, 누군가와 헤어지고 그 헛헛함을 다른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채우려는 이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든 기다림은 ‘그때’가 오기 전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기다림이 해소되는 때는 기다렸던 사람을 만나거나 기다렸던 일이 벌어지는 순간뿐이다. 달리 말하면, 기다림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그가 아직 뭔가를 바라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2024년 12월3일 이후, 우리는 기다림을 계속하고 있다. 봄볕이 푸지게 쏟아지는데도 한겨울에 사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그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 여태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와중에 또 다른 기다림이 나타난다. 의성 산불 소식을 접한 뒤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시바삐 화재가 진압되기를 기다린다. 남태령에서 날아온 물리적 충돌 소식에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다음 소식의 출현을 기다린다. 이것과 그것과 저것을 동시에 기다린다. 자기 전에는 내일쯤이면 희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 기다린다. 기다리는 사람은 기대하는 사람이고, 언뜻 가만있는 듯 보여도 심신이 분주한 사람이다.

 

최근에 변변한 글은커녕 변변찮은 글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생업을 뒤로 미뤄두고 거의 매일 현장에 나가는 이들을 떠올리면, 개인적인 참담함은 단박에 부끄러움으로 바뀐다. 하물며 100일이 넘도록 생업에 지장을 받는 이들은 어떻겠는가. 미안함은 온전히 시민의 몫이다. 미안함마저 시민의 몫이다. 미안함의 자리에 고마움이 들어서기를 기다린다. 기다림은 으레 다른 기다림을 데리고 온다. 기다림을 손잡고 광장에 나간다. 추위도 잊고, 봄이 왔다는 사실도 잊고, 몸의 피곤함도 잊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있다. 함께 기다리기 시작한다. 기다림이 어서 끝나기를 기다린다.

 

최근에 아홉 명의 여성 작가가 쓴 <다시 만날 세계에서>(안온북스, 2025)를 읽었다. ‘내란 사태에 맞서고 사유하는 여성들’이라는 부제가 일러주듯, 이 책에는 광장의 주축으로 자리 잡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시인 유선혜는 이렇게 쓴다. “나는 내가 세계의 일부임을, 세계가 소용돌이치면 나도 그 폭풍에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소용돌이 속에 있다.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 그 폭풍에 휘말리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갑자기 요동하는 불안감에 허덕이며 밤새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면서도, 습관처럼 열렬히 기다린다. 몇달째 다시 만날 세계를 기다리고 기다린다.

 

계엄의 밤이 끝나고 다음날 아침이 밝기를 기다렸던 이들이 변함없이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에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꼭, 간절히, 애타게, 하염없이, 진득하게, 밤늦도록, 그토록, 손꼽아, 열렬히…… 기다림은 기대로 시작되고 믿음으로 이어지며 만남으로써 충족된다. 오늘도 나는 믿음으로 기다린다.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가 온다, 마침내.

 

오은 / 시인

(2025.3.27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