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산책길에서

송담(松潭) 2023. 12. 7. 17:28

산책길에서   

 
 

 
겨울산은 포근하게 보입니다. 잎을 떨꾸어 앙상한 가지들만 남았을 것인데 멀리서 보니 산등성이가 부드러운 솜털로 덮힌 것 같습니다. 겨울눈이 쌓이면 더욱 포근해 보일 것입니다. 겨울산은 ‘어머니산’과도 같습니다. 묵묵하고 변함 없고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바라만 보아도 위안을 줍니다.
 

 
 

 
이 소나무들은 언젠가 심한 태풍에 가지가 찢기고 시달려 변형된 모습입니다. 시련을 이겨내고 굳굳하게 서 있는 모습이 나름 멋져 보입니다.
 

 

 
사철나무는 아니지만 겨울에도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낙엽에 둘러쌓인 연두빛이 선명하고 깨끗합니다. 머지않아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면 결국 스러지고 말 것인데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으니 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눈속에 묻힌 연두빛은 그 선연함이 절정을 이루며 사라져갈 것입니다. 깊어가는 겨울, 아름다운 산화(散華)!

 
 

 
지난해는 가뭄으로 상사호의 저수율이 20~30%로 거의 바닥을 드러냈는데 올 여름 몇 차례의 폭우가 내리더니 만수위(滿水位)가 되었습니다. 가뭄으로 제한급수 등을 겪지는 않았지만 호수에 물이 차니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하늘이 내린 풍부한 선물을 바라보며 환경을 파괴하며 막무가내로 사는 인간들에게 너무 화내지 말고 이렇게 너그럽기를 빕니다.
 
 


돌위에 뿌리를 내린 참나무입니다. 처음에는 바위틈에서 태어났을 것인데 마침내 바위를 반석으로 깔고 서 있습니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하면 바위를 뚫고 내려가 뿌리를 내리고 이렇게 장엄하게 우뚝 서 있는지 경이롭습니다. 그런데 힘샌 참나무 보다 뿌리를 내리고 자신을 덮어도 이해해주고 도와준 바위가 더 훌륭한 것 같습니다. 바위는 뿌리가 자신의 가슴을 파고들 때 아픔을 참고 축축한 물기를 품어 성장을 도왔을 것입니다. 뿌리가 땅속으로 뻗어가도록 길을 열어준 바위입니다. 상생(相生)의 본보기입니다.
 
(2023.12.7)
 

< 2 >
 
겨울이 왔으니, 봄이 멀겠는가
If winter comes, can spirg be far behind
 

 
셸리Percy B. Sholey의 시 < 서풍에 바치는 노래 Ode to the West Wind >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 시를 “이제 조금만 참으면 춥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따뜻하고 화사한 나날들이 닥쳐오리니, 그때가 멀지 않았다.”고 해석하지 말고 미래의 봄을 기다리는 희망에서 “현재의 겨울을 안타깝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꿔보라.”
 
우리가 이 겨울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은 짧다. 곧 봄은 닥치게 되고 그러면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겨울을 시시각각 음미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시인의 마음은 미래가 아니라 자신이 지금 몸담고 있는 현재, 즉 겨울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니체는 현재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삶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 과거에만 집착하거나 미래에만 매달리는 몽유인을 역사적 인간이라고 불렀다. 니체는 이 역사적 인간들이 이 지상에서 불행한 삶을 숙명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만일 행복해지려 한다면 두 가지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망각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다. 망각해야 하는 것은 이미 없는 과거, 아직 없는 미래요. 사랑해야 할 것은 현재 그리고 그 지평 위에서의 삶이다.” 
 
삶에는 봄만이 축복받은 계절은 아니다. 겨울도 그 하루하루를 간절하게 느끼며 살아야 할 안타까운 삶의 시간들이다. 그러니 봄이 닥치기 전에 우리는 겨울을 온몸으로 남김없이 느끼고 향유하도록 애써야 한다.
 
<이왕주 /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중에서>
 
오늘 아침 위 글과 추억의 팝송 한곡을 친구 박형하에게 보냈는데 저녁에 답장이 왔습니다.
 
오늘 강릉의 안목해변에서 부드러운 모래와 하얀 포말을 맨발로 8키로를 3시간 걷고 그냥 집에 왔습니다. 그 해변의 백사장을 걷기 위해 아침730분 출발해 저녁 620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친구가 보내준 글을 읽고 내 자신에게 명분이 확고해졌습니다. 현재 그리고 그 지평위에서의 삶에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언덕위에 하얀 집은 들을 때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이 찡해 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좋은 글과 음악 보내준 친구의 마음이 전해옵니다. 편안한 밤되세요.“ (2023.12.7.)

 

< 3 >

 

둘레길

 

지역마다 둘레길이 있습니다. 산길은 정상으로만 나 있는 줄 알았는데 산허리를 도는 둘레길이 생겼습니다. 등산보다는 트랙킹 코스로 개발된 것이 둘레길입니다. 둘레길이 있으니 멀리 높은 산에 오를 필요없이 가까운 뒷산에서 비슷한 운동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유명 둘레길을 돌려면 제주도나 지리산에 가야합니다.

 

정상으로 오르는 사람은 주로 땅만 쳐다보고 열심히 걷습니다. 정상에 올라가면 확 트인 전망을 볼 수 있지만 그곳에 머무는 것은 잠시입니다. 둘레길은 오르막내리막길을 걸으며 숲속에 핀 꽃이나 식물 등 주변 풍경을 자세히 볼 수 있어 좋습니다.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둘레길을 도는 사람들은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지만 둘레길을 걸었기에 발병이 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안생의 두 갈래 길에서 정상으로 가지 않고 둘레길을 택한 사람들. 굳이 후회하지 않아도 됩니다.

(2024.2.2)

 

< 4 >

 

눈이 침침하고 귀가 멀고

 

눈이 침침하고 밥만 먹고 나면 졸립니다. 낮에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졸음이 옵니다. 이상 증세 같아 뇌파검사를 해 봤는데 이상은 없다고 합니다. TV를 보면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연속극의 스토리나 아나운서의 뉴스해설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볼륨을 크게 틀면 좀 나을 것 같은데 집안의 소음공해가 걱정스러워 그러하지 못합니다. 책을 보면 1~2분내 눈이 아프고 졸음이 오고 집중할 수 없어 5분 내에 책을 덮을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눈이 멀고 귀가 멀어가고 있는 것이 70대 초반의 제 신체 상태입니다. 

가끔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는데 나중에 삭제 해버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내용과 패턴이 그 글이 그 글이어서 새롭지가 않습니다. 제 글씨기의 한계입니다. 

노인은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져 밀도 있는 문장을 쓸 수 없다고 합니다. 물론 일본 작가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노인이 가지고 있는 통찰력이나 지혜, 유연함, 느림의 미학을 ‘노인력’이라고 하면서 이를 통해 악조건을 충분히 극복가능하다고 말합니다.하지만 저는 통찰력도 지혜도 부족하여 제가 실천하고 극복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높은 산은 아니지만 뒷산 임도를  2시간 정도 걷는다는 것입니다. 더위를 잘 타기  때문에 여름철 몇 개월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운동을 합니다. 그러니 노화를 인정하되 너무 기죽지 말아야겠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새 생명의 기운이 다시 제 몸 안에서 꿈틀거릴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2024.2.15)

 

 

< 5 >

 

대충 살다보니

 

 

어제는 잔디밭 관리를 위해 모래 1톤을 구입하여 보토(補土)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앞집 노인회장님께서 모래를 만져보시더니 모래가 아니고 석분이라고 하면서 아마 잔디밭에 뿌린다고 하니 석분을 준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노인회장님의 이러한 지적을 듣지 못했던 집사람도 모래가 아닌 돌가루 같다는 것입니다. 제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모래가 아니냐고 물으니 색깔이 다르고 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모래는 약간 누런 빛깔이 나는데 이것은 회색에 가깝다면서.

 

집사람의 말까지 듣고 보니 모래가 아닌 석분을 사온 것 같습니다. 골재상에서 모래 1톤에 14만원을 주었는데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석분은 모래의 절반 값이라고 합니다. 항의하고 싶었지만 저만 바보가 될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전원생활 만 10년이 다 되었는데 모래와 석분을 구분 못하고 호구노릇을 하였으니 매사를 꼼꼼하게 검토하지 않고 대충대충 하는 사람이 겪는 당연한 실수입니다. 골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집사람도 아는 것을 저는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소심하지만 신중하고 섬세한 집사람의 관찰력이 돋보인 순간이었습니다. 늙을수록 남자는 어수룩해지고 여자는 빠릿빠릿해진다는 말이 맞습니다. 지난번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대부분 환자들은 몸에 링거줄을 단 채 힘없어 보이는 남편들이었고 보호자인 아내들은 아직 팔팔했습니다. 앞으로 집사람의 어떠한 지적도 잔소리라 생각 말고 겸허히 받아드려야겠습니다. 늙어서 아내에게 큰소리 쳐 봤자 헛빵입니다.

(202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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