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 별 사이
- 600대 1의 관계 -
그는 별을 헤아리는 사람이었다. 천문학자인 자신의 일은 별을 보는 것이지만 별 볼일 없는 직업이라고 했다. 별의 개수를 세고 새로운 별을 찾아내고 별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이 그의 주된 일이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한다고 알려줬는데 과학 상식이 짧은 내가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어느 날 그가 물었다.
'선생님, 오후에는 외래를 몇 시까지 봅니까?"
"저녁까지 보죠. 일곱 시에 끝나면 빨리 끝나는 편이에요.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제가 기다려보니 한 시간 동안 선생님 외래에 들어오는 환자가 10명 정도 되더라고요. 홈페이지상으로는 외래가 월·수·금이던데, 지난번 오전 외래는 두어 시까지 보시는 것 같고, 오후 외래를 그 시간까지 보시면 일주일에 외래 보는 시간이 20시간 정도라고할 때… 일주일에 200명을 보시는 게 되더라고요. 이분들이 대략 3주 간격으로 온다고 하면 대략 선생님이 보시는 전체 환자가 한 달에 600명 정도 되나요?"
별을 세는 일이 직업인 사람답게 환자의 수도 잘 셌다. 실제 외래에 오는 환자 수는 600명보다 더 되긴 했지만 그 정도면 그의 계산법은 꽤 정확한 편이었다. 그가 또 물었다.
"600명 환자를 다 기억할 수는 있으세요?"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 계속되었다. 뭔가 허를 찔린 것 같았다.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것이 상책이다 싶었다. 나는 웃으며 농담처럼 되물었다.
"그러면 선생님은 별 이름을 다 기억하세요?"
이렇게 물으면 그도 웃어넘기고 지나갈 줄 알았는데 웬걸,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그 600명 중 한 명인 거네요."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선생님에게는 제가 600명 중 한 명일지 몰라도 저에게는 선생님 한 분뿐이거든요."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상대에게 어느 정도의 비율로 존재하는지 추정하기 위해 한 시간 동안 환자의 수를 세고는 내게는 너 하나뿐인데, 라는 고백 같은 말을 던졌다. 갑자기 의사 가운을 벗어던지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다지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고매한 희생정신과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의사'의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밥벌이로 이 업을 택한 평범한 직업인일 뿐이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심지어 600명에게 '단 한 사람'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그런 과분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600명 중 한 명'이라는 말이 내 머리에 깊이 박혔다. '600명 중 한 명'과 '단 한 사람', 이것이 그가 느낀 의사와 환자 사이의 간극일 것이다. 생사를 다투는 암이라는 절박한 병 앞에서 그는 의지할 곳을 찾아야 했고, 그에게 나는 흰 가운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가 느끼기에 나는 600명의 신도를 둔 교주와 같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날 나에게 '600대 1이라는 불균형'과 '600대 1이라는 거리'를 일깨워주었다.
모든 관계에는 거리와 선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관계를 맺으며 서로 적절한 선, 편안한 거리를 찾는다. 그 적정 수준은 두 사람의 관계의 깊이에 의해 결정되고, 관계의 깊이는 다시 여러 요인에 의해 좌우된다. 만남의 빈도, 감정적 교류, 공동의 목표의식, 서로 간의 이해관계, 두 사람의 친밀도, 성향, 심리적 거리, 그리고 물리적 거리 등, 그런데 이때 나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적절한 거리는 다를 수 있다.
환자와 의사 사이에도 적절한 거리라는 게 있다. 대개 의사가 생각하는 거리는 환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멀다. 600배만큼은 아니어도 분명히 그렇다. 실제로 의사는 정해진 시간 안에 많은 환자를 볼 수밖에 없다. 드라마 속 의사처럼 모든 환자에게 감정 이입을 하거나 상황을 파악하고 헤아려가며 진료하는 것은 판타지에 가깝다. 주어진 시간 안에 정해진 수의 환자를 보려면 어느 정도는 기계적, 습관적으로 진료하게 되고 결국 각 환자의 모든 상황을 신경 쓰지 못할 때가 많다. 그것은 어김없이 환자들에게 서운함으로 돌아간다. 이 의사가 나 한 명만 봐줄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심적으로 느끼는 서운함은 어쩔 수 없고, 결국 600대 1이라는 숫자를 헤아려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가족 같은 의사를 바란다. 그래서일까? 병원 홈페이지에는 대개 '모든 환자를 가족같이 대한다'라는 식의 슬로건이 걸리고 의사들도 그런 류의 자기소개 문구를 적어두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내가 현장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가족 같은 의사'라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의사들이 환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여러 경로로 알게 되는데, 가족을 환자 대하듯이 하지 않고 당연히 환자를 가족처럼 대하지도 않는다. 간단히 말해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말이다.
나는 환자를 잘 보는 편도 아니고 거창한 진료 철학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병원 홈페이지 의료진 소개에 쓸 문구를 아직도 찾지 못했다. '환자를 이해해주는' '환자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같은 말은 낯간지러워 쓰지 못한다. 내가 그런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라는 건 스스로 충분히 알고 있다. 내가 정직하게 쓸 수 있는 말은 고작 '성실하게 출퇴근하면서 큰 실수하지 않고, 환자에게 나쁜 짓 하지 않으며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 싶은' 정도일 것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정해진 짧은 진료 시간 동안 환자의 질문에 답을 다 해줄 수 없고, 말하는 스타일이 직설적인 편이니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아달라고 쓰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병원에서 싫어할 것 같아서 아예 진료 철학 같은 건 써놓지 않았다. 어쨌든 적어도 모든 환자를 가족같이 대하겠다는 거짓말은 쓰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환자를 가족처럼 대하는 의사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환자는 실제로 의사의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 사실을 깨달은 어떤 사람들은 의사 사위를 보든 며느리를 보든 의사를 진짜 가족으로 만들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비싼 값에 그 가족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도처에 넘쳐나는 '가족 같은 의사'라는 말은 그저 판타지일 뿐 현실에서 그런 기대는 접는 게 낫다.
무엇보다 의사가 자신의 환자 전부를 가족처럼 여기면 그 의사도 버티지 못한다. 가족 한 명만 아프거나 생을 마감해도 남은 가족들은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내는데 만약 누군가가 가족이 600명이고, 그 모두가 아프거나 그 모두를 떠나보내야 한다면 어떻겠는가? 그 사람은 필시 미쳐버리지 않을까? 모든 환자에게 부모에게 하듯이, 자식에게 하듯이 정신과 마음을 다 쏟아버리면 의사는 온전히 버틸 수 없다. 그래서 의사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의식적으로 환자와 적절한 거리를 찾는다. 그것이 사람들이 바라는 가족 같은 의사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다.
결국 사람들 사이에는 각자 그 나름의 말 못 할 사정이 있고, 그 사정들로 인해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적정한 수준으로 형성된다. 만족스럽든 만족스럽지 않든 내가 생각하는 적절한 거리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그것은 늘 같지 않다. 어쨌든 "선생님에게는 제가 600명 중 한 명일지 몰라도 저에게는 선생님 한 명이거든요"라는 그의 말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인간관계에서의 거리, 환자와 의사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별을 헤아리는 일을 하던 그는 2019년 4월에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밤하늘의 별을 볼 때마다 이제야 그와 600대 1이라는 관계에서 일대일의 관계가 된 것처럼 느낀다. 멀어 보여도 멀지 않은 것처럼.
내돈 2억 갚아라
한 폐암 환자가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래전에 이혼했고 자식이 없었다. 같이 살던 동거인은 법적으로는 부인이 아니었고 환자의 병세가 깊어지자 그의 곁을 떠났다. 한마디로 이제 보호자가 없다는 뜻이었다. 한동안은 기력이 남아 혼자 병원을 다니며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점점 암이 진행되면서 그는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화장실을 혼자 가기 어려워 간병인을 두어야 했고 병원신세를 져야만 했다. 상태가 더 악화되어 입원을 하게 되자 호스피스 팀에 의뢰가 되었고 호스피스 상담을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부모는 오래전에 두 분 다 돌아가셨지만 남동생이 한 명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혈육이라고는 그 동생뿐이었는데 연락이 끊긴 지 몇 년 되었다고 했다. 4, 5년 전쯤 동생이 사업을 한다며 그에게 2억 원을 빌려 가놓고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돈을 값지 못했고, 그 뒤로 서먹해지는 바람에 연락도 끊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너무 분하고 억울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폐암 말기였다.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가족의 도움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결국 호스피스 팀의 노력으로 우여곡절 끝에 동생에게 연락이 닿았으나 당연히 동생은 형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호스피스 팀은 그에게 환자의 상황을 설명하고 병원에 와달라고 부탁했다.
"형님"
예상대로였다. 소식이 끊긴 지 오래된 형제가 몇 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형제의 상봉을 위해 환자의 침대에서 몇 발짝 물러섰다. 환자의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이내 눈썹이 크게 올라갔고, 동생은 환자를 보고 황망한 눈빛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환자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온몸에 뼈와 가죽만 남은 몸으로 환자는 산소마스크에 의지한 채 근근이 숨만 쉬고 있었다. 곧 동생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몇 년 만에 만나는 형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에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세상에는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연이 있다. 부부는 이혼하면 남이라지만 형제는 서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피가 섞인 사이다. 부부가 의복과 같다면 형제는 수족과 같다. 지구상의 50억 인구 중 유일하게 서로 같은 뱃속에 머물렀던 존재는 부정한다고 부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어쨌든 다시는 없을 것 같았던 형제의 만남은 형의 죽음을 앞두고 이루어졌다. 순탄치 못한 삶이 갈라놓았던 두 사람을 죽음이 다시 만나게 한 셈이었다.
형제는 서로 한참 마주보았다. 둘 사이에는 세월의 공백만큼이나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병실의 적막은 깊고 또 깊었다. 동생은 형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한 채 어쩔 줄을 모르고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2억 원이라는 돈과 원망과 세월이 할퀴고 간 두 사람 사이의 틈은 생각보다 깊어 보였다.
한참 뒤, 환자가 동생에게 할 말이 있는지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숨이 차서 목소리를 크게 낼 기력조차 없던 형이 자신을 부르자 동생이 다가가 형의 얼굴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동생은 곧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드디어 화해의 순간이 왔구나! 나는 조금은 두근대는 마음으로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제 두 형제는 화해하고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우애롭게 보낼 것이다.
환자는 동생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했다.
“너… 내 돈. 2억 갚아라”
그 순간 병실 안에 있던 모두가 귀를 의심했다. 병실에는 싸늘한 정적이 홀렀고 훈훈했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천천히 말했다.
"내 돈·… 2억.… 갚으라고."
환자의 동생은 그 뒤로 다시 병원을 찾아오지 않았다. 환자도 더는 동생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동생은 간병인을 보내주었고 그 비용은 본인이 부담했다고 들었다. 며칠 후 환자는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가운데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무연고 시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을 보면 적어도 시신은 동생이 수습해 간 것 같았다. 결국 '내 돈 2억 갚아라'가 환자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 된 셈이다.
그의 삶에서 2억 원은 어떤 의미였을까? 돈보다 자신의 믿음을 져버린 동생이 더 원망스러웠던 걸까? 되돌릴 수 없는 과거보다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생각했다면 그렇게 쓸쓸하게 떠나지는 않았을 텐데.
종앙내과 의사이다 보니 삶의 마지막을 목도하는 일이 많고 마주하는 사연도 각양각색이다. 그 환자 이전에나 이후에도 환자의 가족들이, 주변인들이 돈 때문에 다툼하는 꼴을 적잖이 봐왔다. 그럴 때면 가끔 그 병실에서 환자가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2억 값아라’라고 말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한 인간이 혈육에게 남기는 마지막 한마디가 '내 돈 2억 갚아라'였던 것은 씁쓸했고, 쓸쓸한 죽음은 언제나 그렇듯이 안타깝기만 하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었을까
외래를 막 끝내고 나왔을 때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선생님께 진료받는 80세 폐암 환자, A할머니 아시죠?
폐렴 때문에 응급실에 오셨는데 기도삽관했고 인공호흡기 달았습니다. 내과계 중환자실로 입원하려고 하는데 선생님 특진으로 올리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A 환자분이요? 잠시만요,"
CT 사진과 의무기록을 살펴본 내 얼굴은 잔뜩 찌푸려졌다. 응급의학과 선생님의 눈에는 항생제를 쓰면 좋아질 폐렴이 보였을지 몰라도 내 눈에는 항암치료에도 불구하고 커져버린 암 덩어리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암 덩어리가 기관지를 막았고 그로 인해 폐렴이 생겼다. 인공호흡기를 달아도 암 덩어리가 계속 기관지를 막는 상태에서는 어차피 항생제 치료도 듣지 않을 것이 뻔했다.
"A 환자분 폐암이 악화됐는데. 중환자실 가셔도 좋아지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인공호흡기를 이미 단 건가요?"
응급의학과 선생님의 대답은 퍽이나 짧았다.
"왜요? 그분 CT에서 암 커진 것 보셨죠? 중환자실 가셔도 암이 해결 안 돼요. 그러면 결국 인공호흡기 못 떼고 돌아가실 거예요."
"저희도 그 점을 생각 안 한 것은 아닌데요. 가족분들이 중환자실을 원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러면 인공호흡기 안 달고 바로 돌아가시게 놔뒀어야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가족들은 인공호흡기를 원했는데요?"
응급의학과 선생님 말 속에 가시가 있었다. 웅급실 입장도 알면서 왜 그러나는 것만 같았다. 늘 최선을 다해달라고 했던 가족들을 알고 있기에 할 말은 없었다. 응급의학과 입장에서도 당장 응급실에서 돌아가시게 하는 것보다 인공호흡기를 다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응급의학과에서도 환자의 상황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응급실은 늘 환자가 많다. 이 가족들에게 할머니의 상황이 이러이러하다는 것과 할머니에게는 중환자실이 왜 의미 없는지를 설명해서 중환자실로 환자를 옮기지 않도록 설득하는 데는 30분 이상 걸려도 인공호흡기를 다는 것은 5분이면 끝난다. 나중에 다른 보호자가 뒤늦게 와서 왜 어머니를 죽게 내버려뒀냐고 멱살이라도 잡으면 응급의학과 선생님들도 골치 아파진다. 게다가 일단 환자가 중환자실로 가면 그 다음부터는 응급의학과 소관이 아닌 내과 소관으로 넘어간다. 응급의학과 입장에서는 중환자실로 가는 것이 여러모로 합리적인 결정이다.
생각보다 많은 보호자와 가족이 의학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드리는 것이 부모에 대한 효도이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보호자들은 대개의 경우 환자에게 중환자실이 아무 의미가 없어도 중환자실을 고집한다. 게다가 환자에 대한 미안함이 클수록 더 그렇다. 환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사에 대한 중요한 결정이 자신은 제외된 채 가족과 의료진, 제 3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셈이다. 살았을 때도 편치 않고 죽을 때도 편치 않게 되어버린다.
할머니도 그렇게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한 달여를 버텼다. 최선을 다해달라는 가족들은 끝내 '심폐소생술 거부 동의서'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버티고 버티던 할머니의 심장은 이제는 좀 쉬고 싶다며 어느 날 갑자기 멈춰버렸다.
"선생님, 어레스트예요!"
다들 할머니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가족들이 '심폐소생술 거부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료진은 CPR(심폐소생술)을 해야만 했고, 기계적으로 몰려온 사람들이 CPR을 시작했다. 인턴 선생님이 흉부 압박을 시작하자 뚝 소리가 나며 할머니의 복장뼈가 푹 꺼졌다.
제세동기라 불리는 전기충격기가 환자의 몸에 가해지자 평 소리와 함께 환자의 늙고 작은 체구가 들썩였다. 노구가 다시 한 번 허공에 떠올랐다. 흉부를 압박할 때마다 뚝뚝 소리가 났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더 부러질 갈비뼈가 없어지자 이제는 부러진 갈비뼈가 서로 맞닿아 뼈 갈리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렀다.
"인턴 선생님. 살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눈치 없는 인턴이 최선을 다해 흉부압박을 하자 주치의는 적당히 살살 하라고 주의 아닌 주의를 주었다. 어차피 '쇼피알(환자는 가망이 없으나 어쩔 수 없이 보여주기(Show) 위해서 하는 CPR이라는 뜻)'인데 제대로 CPR을 할 이유가 없었다. 갈비뼈만 더 부러져 봐야 나중에 가족들 보기에 좋지 않았다. 이미 열려버린 눈동자와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면서 인턴은 최대한 살살 흉부를 압박했다. 주치의가 간호사에게 물었다.
"보호자분들 오셨나요?"
"네, 지금 혜화 로터리 근처래요. 곧 도착하신대요.”
모두들 보호자와 가족들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호자가 오면 주치의는 나가서 보호자와 가족들에게 상황을 설명할 것이다. 가족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이면 쇼피알 연극은 끝나고 주치의는 사망을 선언할 수 있다. 환자의 저승 가는 길은 그렇게 힘들고 험난했다.
가족들과 의료진은 환자에게 현대의학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고 환자는 너무 힘들게 저승길로 떠났다. 나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자꾸 되묻게 되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고.
인생 리셋
남들은 택시 운전한다고 하대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이 나이까지 할 수 있는 직업이 몇 개안 돼요. 이 일이 좋은 게 정년이 없거든요. 택시 운전한다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 보면 속으로 그래요. '너는 무슨 일 하는지 모르겠지만 너도 내 나이까지 일할 수 있나 보자'하고요.
저는 절대 무리해서 일 안 해요. 한 달에 200만 원 정도 버는데 마누라도 그런가 보다 하고 내버려 둬요. 암에 걸리고 난 뒤로는 돈 벌어오라는 소리 안 해요. 집에서 빈둥대지 않고 아침밥 먹고 나가서 저녁 때 들어오고, 한 달에 한 번은 월급봉투라고 손에 쥐어 주니 별 이야기 안 하더라고요. 삼식이 아닌 것만 해도 어디예요. 암수술 세 번 받고 나니 마누라도 그러더라고요. 제가 안 죽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아프지나 말라고.
참, 저희 집은 제사도 다 없앴어요. 며느리들이 싫어하는 건 눈치 보게 되더라고요 아니,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중요한데 죽은 사람 때문에 산 사람들이 싸우더라니까요? 집안 분위기 안 좋아지는 것 보고 제가 그냥 다 없애자고 했어요. 나 죽으면 내 제사 때문에 애들이 계속 싸우겠구나 싶더라고요. 살아서 잘해준 것도 없고 물려줄 재산도 없는데 죽고 나서도 애들 힘들게 하면 내가 나쁜 놈이죠. 그래서 저희는 명절 때 제사 안 지내고 그냥 놀러 다녀요 그러니까 다들 좋아해요. 명절 때 더 열심히 와요. 올해는 어디로 놀러갈지 지들끼리 계획해서 와요. 비용은 똑같이 나눠서 N분의 1이에요. 사실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구경하며 지내기에도 인생이 짧거든요 그런데 예전에는 왜 그렇게 싸우면서 지냈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유서도 다 써놨고 죽으면 화장해서 강가에 뿌리라고 했어요. 죽은 사람 챙기지 말고 그냥 너희들끼리, 산 사람들끼리 즐겁게 지내라고요. 나중에는 지들도 그러고 싶대요.
택시 모는 제 동료 중에서는 교통사고로 죽은 친구도 있어요, 아침만 해도 반갑다고 인사했는데 저녁때 장례식장에서 만나니 어찌나 허무하던지.. 그렇게 갑자기 가지 않고 죽을 준비까지 끝내 놨으니 저는 얼마나 다행이냐 싶더라고요. 행복한 거죠. 안 그래요 선생님?"
그가 그렇게 물었을 때 택시는 막 청계천을 지나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진심으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암 걸리고 나서 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죠. 선생님, 고맙습니다. 암 치료 잘해주셔서 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우리 아들놈이 그러더라고요, 아버지 인생이 리셋된 것 같다고 허허."
내가 기억하기로 그는 배운 것이 별로 없었고 남들은 한 번도 안 걸리는 암을 두 번이나 걸렸다. 암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고 암이 다시 도져서 항암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지금은 괜찮지만 언제 또 어떻게 암이 재발될지 모르는 처지였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뒷좌석에서 택시비를 내고 몸을 일으키는 남자가 백미러 끝자락에 스쳐 지나갔다. 아픈 데 없이 건강한 사십대 중반의 남자였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라 불리는 대학을 졸업했고 의사로서 나름 인정받고 있으며 교수라는 안정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외적인 조건을 놓고 보자면 운전석의 그보다 못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순수하게 행복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행복이 어떤 절댓값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와 나의 간극에 의문
을 가지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 것만 같아서 그 사실이 조금 더 나를 슬프게 했다. 그것은 조건의 차이가 아니라 근원적인 부분이었으므로.
마지막 뒷모습
첫 만남, 첫사랑, 첫눈, 처음 학교 가던 날, 첫 월급. 우리는 대부분 첫 순간을 잘 기억한다. '처음'의 순간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분명하고 저마다 거기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마지막'은 잘 모른다.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음은 늘 지나서야 깨닫기 때문이다. "아, 그게 끝일 줄 몰랐지"라는 말이 낮설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일까? 처음이 긴장과 설렘으로 수식된다면 마지막은 씁쓸함과 아쉬움, 후회 같은 단어가 뒤따르곤 한다. 그건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끝내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수많은 처음과 마지막이 있을 테지만 우리 인생의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은 탄생과 죽음이다. 그리고 살면서 맞는 여러 종류의 처음과 마지막과 달리 이 시작과 끝은 내가 아닌 타인의 기억으로 남는다. 또한 탄생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맞는 것이지만 죽음만큼은(불의의 사고만 아니라면) 준비할 수 있다. 언젠가 분명히 '죽음'의 순간이 온다는 건 사실이고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점이 몹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이 '준비할 수 있는 죽음'을 '어쩌다 갑자기 맞는 죽음으로, '이렇게 죽을 줄 몰랐지'로 끝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의 폐암이 진행되면서 손을 놓아버린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그날도 심한 두통과 전신 통증에 시달리셨다. 식사도 며칠째 제대로 못하신 상태라 집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내가 학교에 간 사이에 어머니가 아버지를 급히 병원으로 모셔서 나는 아버지가 입원하신 사실을 몰랐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텅 빈 집에는 대충 닫아둔 약병과 아무렇게나 구겨놓은 약봉지, 개다 만 옷가지와 미처 치우지 못한 그릇 같은 것들이 어질러져 있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외출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는 종앙내과 의사이지만 마지막을 예감하고 뒷정리를 하고 나오는 환자를 별로 보지 못했다. 임종을 앞둔 말기암 환자조차도 집을 나서면서 이 외출이 집을 나서는 마지막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병원에 머무는 것은 '잠시'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대개는 그 상태로 '갑자기' 임종을 맞는다. 아마도 대부분 그 집에도 내 아버지의 남은 물건들처럼 고인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그대로 남겨져 있을 것이고, 그것이 그 고인의 마지막 흔적이 될 것이다.
내가 목격한 마지막 뒷모습은 때로는 정리되지 않은 돈이었고 사람이기도 했는데, 그것들은 대체로 시끄럽고 혼란스럽게 뒤얽혀 고인에 대한 슬픔을 넘어 분노로, 지리멸렬함으로 끝나고는 했다.
고인이 정리하지 못한 관계들이 남아 있는 이들을 괴롭게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결국 지켜보면 무엇이든 간에 정리되지 않고 남은 것들은 대개 아름답게 기억되지 못할 것들이었고, 남은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고인의 뒷모습으로 남았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종종 그조차도 책상 정리를 하듯이, 집을 치우듯이 평소에 정리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흔적들을, 나의 관계들을, 나의 많은 것들을 오늘 집을 나서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살펴야 한다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고 지금의 내 흔적이 내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덜 어지르게 되고, 더 치우게 된다. 좋은 관계는 잘 가꾸게 되고 그렇지 못한 관계는 조금 더 정리하기가 쉬워진다. 홀가분하게, 덜 혼란스럽게 자주 돌아보고 자주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나부터도 잘하지 못한다. 삶에 대한 의지와 집착은 한끝 차이이고,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은 일단 마음부터 편하지 않은 일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떠나고 난 뒤 타인의 기억에 남을 내 마지막이 어떻게 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마치며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살아온 인생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어떤 행로를 걸어왔든 종착역이 죽음이라는 것만큼은 모두가 같다. 다만 그 종착역에 닿는 모습은 또 각기 다르다. 마지막 순간이 되면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삶을 정리하고,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종착역에 당도한다.
20년 가까운 시간, 나는 종양내과 의사로서 많은 환자들이 삶을 정리해가는 과정을 쭉 지켜봐왔다. 예정된 죽음 앞에서 그들이 드러내는 삶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때때로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내 삶에서도 그들의 모습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내 삶의 얼굴이 다른 이들로 인해 드러나게 될 때 거울을 보는 기분으로 내 삶과 죽음을 마주한다. 내 환자들의 삶과 나의 삶은, 아니 우리의 삶은 다른 듯 닮았다. 아마도 죽음 역시 그러할 것이다.
삶을 잊고 있을 때 떠나간 환자들이 들려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마지막은 언제나 나를 항해 묻는다. 언젠가 당신도 여기에 다다르게 될 텐데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떤 모습으로 여기에 당도하고 싶은가? 나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고 다시 한번 생의 감각이 팽팽해진다. 어쩌면 죽음만큼이나 삶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죽음만 잊고 사는 것이 아니다. 삶도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이 삶을 느끼지 않고 산다. 잘 들어보라. 삶을 잊은 당신에게 누군가는 계속 말을 걸어오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종착역에 당도한 이들은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묻는다. 이제는 남아 있는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서 대답할 차례다.
김범석 /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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