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버킷리스트 같은 건 쓰지 않으련다
추석연휴에 TV에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애니메이션 영화였는데,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멕시코의 명절을 소재로 가족에 대한 소중함에 대해 살펴보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다. 이번 추석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가족 간의 만남을 자제하고 차례나 추모도 온라인으로 대체하자던 명절이었는데, 그 와중에 공중파에서 편성된 애니메이션이 죽은 자의 사진을 제단에 올려 추모하지 않으면 그들이 명절에도 가족을 만나러 이승에 올 수 없고, 그렇게 반복되어 잊히면 저세상의 영혼마저 영영 소멸한다는 내용이라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모임 자제 권고를 내린 이들에게 항의하는 건가, 아니면 그 권고를 따른 이들을 비난하고 꾸짖기 위한 편성인가 싶어 어이없는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어쨌거나 영화는 대체로 좋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한 사람이 사라지는 건 죽는 순간이 아니라 그 사람을 기억하는 이가 사라지는 순간이라는 내용의 문장을 어느 소설에서 보았던 기억이 떠올라서 책장을 다 뒤졌는데, 찾지 못했다. 하기야 그런 생각이 어느 한 소설에만 담겨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별은 물리적 공간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기억에 의해서도 비롯된다는 건 몇 번의 이별을 겪다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그것이 삶에서의 이별이든,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든 말이다.
그런데 죽음 이후에 잊혀가는 일은 꼭 그렇게 슬픈 일이기만 한 건가, 하는 의문도 든다.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잊히는 일은 쓸쓸한 일이 맞고, 죽은 이후 누군가 나를 기억해준다면 그것도 마음 따뜻한 일이긴 하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떠난 자들에 대한 기억을 나누는 건, 죽은 자보다는 남아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여전히 남아있는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살아있는 자들의 기억에 매달려 사후 세계를 연명하려 드는 건 어쩐지 집착같아 더 쓸쓸해 보인다. 무엇에도 연연하지 않고, 완전한 소멸을 바라는 일은 왜 안 되는 걸까 싶지만 사람마다 처지가 다르듯 죽음마다 이유도 다를 터이니 그런 바람이 다 쉽고 마땅한 건 아닐 것이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차마 놓지 못하는 이별도 있기는 할 것이다.
버킷리스트라는 건 어쩌면 그런 죽음을 대비하기 위한 마음가짐일지도 모르겠다. 버킷리스트라는 말을 나는 영화에서 처음 접했다. 오래전 영화라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을 가리키는 버킷리스트를 생의 미련을 비워내기 위한 준비로 이해했다. 괜찮은 방법이네 싶었지만 아직 그걸 작성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나도 써보지 않은 버킷리스트를 내 아이는 써봤다. 심지어 열두 살 무렵에, 무려 100가지나. 학교 과제였는데, 죽음을 매개로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배우라는 건가 싶으면서도 한참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게 삶을 정리할 꿈을 묻는다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요즘은 버킷리스트의 의미가 다소 바뀐 것 같다. 비우고 지워야 할 것들을 적는, 그래서 남은 삶의 후회를 줄이기 위한 목록보다 평소 해보고 싶었던, 그러나 주위에서 쉽게 이해해줄 것 같지 않은 일을 차원 높은 걸로 포장해서 이해받고 싶을 때 그 말을 쓰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하니 100개씩도 적겠지. 자기 꿈을 뭐라고 부르든 자유겠지만, 살아서는 물론 죽음 앞에서마저 어떤 꿈도 꿔본 적 없고, 생애 마지막까지 단 한 가지도 품지 못하고 사라지는 어떤 삶들을 떠올리면 저 즐겁게 살자고 꾸는 꿈마저 거창하게 포장하고, 이해받으려는 모습이 이기적으로 보이기는 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버킷리스트 같은 건 쓰지 않고 싶다. 아이들에게도 그만 쓰게 했으면 좋겠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살아갈 꿈을 묻는 게 맞고, 즐겁게 살자고 계획한 꿈은 즐겁게 소비하시라. 꿈도 꾸지 못하는 사람들이 즐비한 옆에서, 저 홀로 즐거운 꿈마저 포장지로 꾸미는 건 좀 과하다.
한지혜 / 소설가
(2020.10.7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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