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는 것, 고통을 느낀다는 것
불교의 가르침은 고(苦), 즉 고통의 자각 혹은 고통의 느낌에서 출발한다.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일체 모두가 고통이다'라는 싯다르타(Siddhartha Gaurama, BC 563?~BC 483?)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모든 것이 고통이라니, 얼마나 당혹스러운 가르침인가? 보통 종교라면 회망과 낙관적인 미래를 이야기하기 마련인데, 불교는 애초부터 모든 것이 고통이라고 말한다. 불교 경전에는 '타타타(tathata)'라는 산스크리트어가 자주 반복된다. '있는 그대로'라는 뜻의 타타타는 한자어로 진여(眞如), 여실(如實), 혹은 여여(如如)라고 번역된다. 마음속에 어떤 선입견도 갖지 않고 외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일체개고'는 타타타한 진실, 여실한 진리, 혹은 여여한 진상이다.
여기서 불교의 최종적 이념이 바로 '자비(慈悲)'라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비는 산스크리트어 '마이트리 -카루나(maitri karuna)'의 한자 번역어다. '마이트리'는 '우정'을 의미하고, '카루나는 '타인의 고통을 아파한다'는 뜻이다. 즉, 자비는 동등한 관계에서 상대방의 불행이나 고통을 아프게 느끼는 감정이다. 나와 상대방이 모두 혹은 동등하게 불행하거나 고통스럽다는 통찰이 '자비'라는 말에 전제되어 있다. 고통을 느끼는 것, 그래서 그 고통을 어떻게든 완화시키려 하는 것, 그것이 자비다. 그러니 '일체개고'라는 가르침을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허무주의나 비관주의로 이해한다면,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고통을 느꼈기에 그 고통을 덜어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비다.
죽은 듯 보이는 사람을 발로 차보라. 그 사람이 아픔을 느껴 움직이면 그는 살아 있는 것이고, 아무리 발로 차도 꿈찍도 하지 않으면 그는 아마 죽은 상태일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통이나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다. 살아 있는 상태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살아 있다면 고통을 느낀다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배고픔을 느끼고, 외로움을 느끼고, 아픔을 느끼고, 추위도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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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이 나의 아픔이나 고통처럼 느껴진다면, 그 타인은 이미 내 몸이나 다름없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우리는 그 사람을 더 이상 고통스럽게 할 수 없다. 누군가의 목을 조르려면 내 손에 그 사람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 동물을 죽이려면 그 동물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 꽃가지를 꺾으려면 그 나무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 즉 고통의 감수성이다. 바로 이것이 자비라는 거창한 용어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평범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뿌리다.
과거 독재 시절, 시대에 걸맞게 학교에는 '사랑의 매'라는 것이 있었다. 학생들을 미워해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때린다는 체벌의 논리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선생님이 학생들의 종아리에 매를 대는 순간 아이들의 고통이 느껴진다면, 과연 선생님은 계속 매를 댈 수 있을까. 한 대 두 대 때리면 때릴수록 아이들의 아픔이 느껴진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계속 때릴 수 있을까? 아내에 대한 사랑, 남편에 대한 사랑, 아이에 대한 사랑, 후배에 대한 사랑 등 타인에 대한 사랑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은 타인의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다시 말해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의지이자 감정이기 때문이다.
강신주 /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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