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호곡장(好哭場)

송담(松潭) 2021. 2. 8. 06:50

호곡장(好哭場)

 

 

'호곡장'은 한바탕 울기 좋은 땅이란 뜻으로 박지원의 그 유명한 여행기인 「열하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열하일기」는 그의 나이 44세 때인 1780년(정조 4)에 8촌 형인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칠순잔치) 사절로 연경(북경)에 가게 되자 그를 따라 북경에 가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해 남긴 견문기다. 이때 그는 공적인 임무를 띠고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 열하는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장을 가리키는 말로, 현재 허베이성에 위치한 청더시다. 원래 이 사행에서 열하는 일정에 없었고 목적지는 연경이었는데, 마침 황제가 피서 산장인 열하에 머물게 되자 조선 사행단을 그리로 불러들이는 바람에 열하에 가게 된 것이다. 덕분에 (?) 박지원은 조선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열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일정은 고되었지만 기왕 간 건데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글은 압록강을 건너고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의 기록인 「도강록」 중 7월 8일에 쓴 글이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 벌판이 눈앞에 펼쳐지자 한 번도 본적 없는 그 광활함이 박지원을 사로잡았다. 그는 대뜸 말했다.

 

"울기에 딱 좋은 곳이로다. 울어도 좋겠다!"

호곡장 가이곡의(好哭場 可以哭矣)

 

이에 함께 가던 정 진사란 인물이 물었다.

"천지 사이에 이렇게 끝도 없이 드넓은 곳을 보고는 갑자기 울고 싶다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박지원이 '울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쳐 보인다.

 

"사람들은 칠정 중에서 슬플 때만 울음이 나오는 줄로 알고 칠정의 모두에서 울음이 나오는 줄은 모르고 있답니다. 기쁨이 사무치면 울음이 나오고, 분노가 사무치면 울음이 나오고, 즐거움이 사무쳐도 울음이 나오고, 사랑이 사무쳐도 울음이 나오며, 미움이 사무쳐도 울음이 나오고, 욕망이 사무쳐도 울음이 나오는 법이지요. 응어리지고 답답한 마음을 풀어서 시원하게 하는 것으로는 그 어떤 것도 소리보다 빠르지 않으니 울음이란 천지간 우레에도 비교할 수 있지요. 지극한 정에서 울음이 터지고, 터진 울음이 사리에 맞는다면 웃음과 울음이 뭐가 다르겠습니까? 사람이 태어나 정을 풀어내면서 일찍이 이런 지극한 처지를 겪어 본 적이 없어서 칠정을 교묘하게 안배해서 울음을 슬픔의 짝으로 맞추어 놓았지요."

 

그의 얽매이지 않은 생각이 잘 드러난다. 마음껏 울라니! 칠정의 모든 곳에는 울음이 깃들어 있다니! 성리학에서는 감정을 치미는 대로 터뜨리기보다는 자제하고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는데, 박지원은 슬픔을 그렇게 가둬두기 때문에 초상 치를 때에나 억지로 ‘애고’ 하며 울부짖는다고 말한다. 칠정에서 우러나온 지극하고도 진정한 소리를 꽉 눌러 참고 억제하게 하여 천지간에 갑갑하게 가두어 놓았기 때문에 감히 잘 펼쳐서 풀어내지 못한다고.

 

이어 박지원은 자신의 울음이 갓난아기가 터뜨리는 그 울음과 같다고 말한다.

 

"아이가 엄마의 태중에 있을 때는 캄캄하고 사방이 막혀있으니 옮매여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넓고 환한 곳으로 솟구쳐 나와 손을 펴고 발을 뻗으니 마음과 뜻이 공활해져 시원할 테지요. 참된 소리를 내질러서 마음껏 한번 펼쳐내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요? 그러니 갓난아기를 본받아 꾸밈없는 소리를 내야 마땅하지요.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면 거기도 울음을 터뜨리기 좋은 곳이고, 황해도 장연의 금사사에서 넓은 바다를 바라보면 거기도 울음을 터뜨리기 좋은 곳이죠."

 

좁은 나라에서 살다가 하늘 아래 아무 막힘이 없이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는 광활한 공간을 보게 된 박지원은, 그 경험을 엄마 뱃속에 갇혀 있다 세상에 처음 발을 내딛는 갓난아기의 경험에 빗댄다. 답답한 속이 뻥 뚫리는, 그 넓이만으로도 좁은 나의 소견을 터뜨려줄 것 같은 벅찬 경험을 하면서 제대로 한 번 울만 하다고 느낀 것이다.

 

임자헌 / ‘마음챙김의 인문학’중에서

 

 

 

 

1만 번은 읽어보았는가?

 

 

 

 

백이전은 11만 3,000번을 읽었고, 노자전, 분왕, 백력금, 주책, 능허대기, 의금장, 보망장은 2만 번을 읽었다.

 

김득신 (1604년(선조37)~1684년(숙종10)), 백곡집의 부록 중 읽은 책의 횟수를 기록해봄(독수기) 중에서.

 

무시무시한 글이다. 여러분은 마음에 드는 글을 몇 번까지 반복해서 읽어봤는가? 아무리 많아도 10번쯤? 인생을 걸 책이면 30~40번쯤? 책 한 권을 서너 번만 읽어도 얼마나 자랑하는데 이 글의 지은이는 스케일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무려 만 단위로 얘기하다니. 그동안 지적으로 자만했던 것을 절로 반성하게 되는 순간이다.

 

김득신은 조선 후가기의 이름난 문인이다. 그런데 이렇게 문장으로 이름나기까지는 사연이 있다. 할아버지가 임진왜단 때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 장군이다. 아버지 김치도 대사성, 동부승지, 경상도 관찰사 등을 지내는 등 집안이 좋았다. 얼마든지 공부하고 공부한 만큼 장래가 창창한 환경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린 김득신이 천연두에 걸린 것이다. ‘호환마마’ 보다 무섭다고 할 때 '마마'가 바로 천연두다. 당시에는 앓으면 거의 모두 사망에 이르는 엄청나게 무서운 병이었다. 죽음의 목전까지 갔으나 다행히 나았다. 그런데 이 무서운 병을 호되게 알아서인지 두뇌발달에 문제를 겪었다. 미련하고 굼뜨고 둔했다. 10살이 되도록 글을 잘 읽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끈기라는 장점이 있었다. 노력의 달인이었다. 그는 39세 때 진사시에 낮은 성적으로 겨우 합격했고, 대과는 그로부터 20년 뒤인 59세 때 그것도 병과 19등이라는 그리 좋지 않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는 34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글다운 글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글은 그가 이때부터 읽기 시작해서 67세까지 34년간 읽은 고문의 목록과 횟수를 적어놓은 것이다. 특히 앞에서 언급했듯이 「백이전」을 11만 3,000번이나 읽었는데, 당시에는 10만을 '1억'이라고 했으므로 그는 자신의 서재 이름을 억만재(億萬齋) 라고 지었다.

 

지독한 노력이다. 내가 한문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 선생님들께서 문리(文理)가 트이려면 「논어」 2,000독, 「맹자」1,000독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옛날 선비들은 그렇게 읽었다면서 말이다. 그렇게 읽으면 못 외울 글이 무엇이 있겠는가? 예전 선비들은 아침에 일어나 식전에 「맹자」 전체를 암송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는데, 이렇게 죽자사자 읽으면 그 내용과 문형이 내 안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도 남는다. 유명한 선비들 중에 「맹자」를 1,000번을 읽으며 이치를 깨쳤다는 분들이 꽤 있다. 윤동주 시인의 스승이자 북간도 독립운동의 선구자인 김약연 선생은 맹자를 1만 번 정도 읽어 맹자에 정통한 유학자로도 유명했다. 임진왜란 직전에 서애 유성룡의 형이 유성룡의 사가독서 기간에 「맹자」 1,000독을 권한 일도 있었다. 그렇게 하면 다른 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한문을 하지만 1,000독 근처에도 못 갔다. 매일 횟수를 정해놓고 읽는다고 한들 어느 세월에 1,000독을 하겠는가. 현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좋아하는 책, 아무리 절실한 책, 아무리 자기 신조로 삼는 책이라도 1,000번은 못 읽을 것이다.

 

어던 글이라도 김득신처럼 읽으면 다 외우고도 남는데. 그렇다면 다 외운 글을 왜 또 읽었을까? 우리는 '안다'는 생각이 들 때 교만해져 기본을 놓아버린다. 김득신이 이처럼 글을 반복해서 읽은 것은 글에 대한 겸손함 때문이 아닐까? 한 글자 한 글자,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글의 내용과 형식은 물론, 그 깊이와 넓이를 하나하나 되짚어보는 것이다. 동시에 나의 글과 생각도 점검하며 부족한 부분과 넘치는 부분을 스스로 찾아내 보는 것이다. 익숙한 자신의 전문 분야를 이제 막 새로운 세상을 접한 어린아이처럼 낯설게 바라보고 단련하고 또 단련하는 것, 대가는 그렇게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나는 못해!", "나는 머리가 나빠!"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1만 번 반복해보지도 않고서 말이다. 아둔해서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39세에야 요즘으로 치면 대학입시에 해당하는 진사시를 겨우겨우 통과한 김득신이 문장으로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그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는 '독수기를 남기며 앞과 뒤에 이런 글을 붙여두었다.

 

"게으른 후손들이 눈 닿는 곳마다 이것을 보고 자신의 선조가 얼마나 부지런히 학문했는지를 알고 그 만 분의 일이라도 이어가기를 바란다."

 

머리를 탓할 일이 아니라 게으름을 탓할 일이다. 무엇이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다 보면, 끝내 손에서 놓지 않다 보면, 결국 성장한다.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는 건 속담이 아니라 진실이다.

 

임자헌 / ‘마음챙김의 인문학’중에서

 

 

‘좋아요’의 그물

 

사람다운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하면 좋아할 만한 일이고, 사람답지 못한 사람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도 좋아할 만한 일이다. 사람다운 사람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면 그건 걱정할 만한 일이고, 사람답지 못한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한다면 그 또한 걱정할 만한 일이다.

 

人而人吾, 卽可喜也 ; 不人而不人吾, 卽亦可喜也

인이인오, 즉가회야: 불인이불인오, 즉역가희야.

 

人而不人吾, 卽可懼也: 不人而人吾, 卽亦可懼也.

인이불인오, 즉가구야: 불인이인오, 즉역가구야.

 

이달층(1309년(중선왕1)~1384년(우왕10)), 『제정집」 권2 「잠箴」

사랑받고 미움받는 일에 대해 경계함(애오잠愛惡箴) 중에서.

 

 

요즘 '관종(관심종자)'이란 말이 유행이다. SNS (사회 관계망 서비스)로 개인이 다수에게 주목받을 수 있게 되면서 생긴 현상인 듯하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인터넷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대개 ‘나와 내 주변’ 정도로 타인과의 관계가 제한적이었다. 그런데, 온라인으로 불특정 다수와 접촉할 수 있게 되면서 이른바 '인기'가 매체에 등장하는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누릴 수 있는 것이 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SNS 사용자들이 ‘좋아요’에 취해가고 있다. ‘좋아요 많을수록 내가 멋진 사람 혹은 영향력 있는 사람이된 것 같고, 그렇게 ’관종‘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좋아요'를 많이 눌러준다고 정말 내가 괜찮고 멋진 사람인 것일까?

 

이달충은 말한다. 내가 받는 평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내리는 평가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논어」 「자로」 편에 보면 공자가 제자 자공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한다.

자공이 물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주변 사람이 모두 그를 좋아해요, 그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좀 그런데?"

"그럼 주변 사람이 그를 모두 싫어하면요? 그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것도 좀 그런데? 주변 사람 중에서 착한 사람들은 좋아하고 못된 사람들은 싫어하는 사람이 낫지 않겠냐?"

 

정말이지 맞는 말이다. 좋은 사람이 나를 칭찬해야 내가 좋은 사람인 거지 나쁜 사람이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 건가? 그리고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누구에게든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는다면 그건 이도 저도 아닌, 그저 칭찬받기 위한 자아만 있을 뿐 아무 판단도 기준도 없는 사람일 수 있다. 그래서 공자는 그런 사람을 매우 싫어했다. 세상의 가치판단을 흐리는 사람이라면서 말이다.

 

사실 누군가 나에 대해 "그 사람은 참 아니야"라고 말한다면, 그걸 전해 듣는 순간 머리꼭지가 돈다. "네가 뭔데 날 판단해?"라며 화부터 치솟는다. 인격이 성숙한 사람이 나를 칭찬하고 인격이 미성숙한 사람이 날 배척한다면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반증이니 그러려니 할만도 하건만, 상대가 어떤 인격을 지녔든 나에 대해 좋지 않은 반응을 보이거나 좋지 않은 말을 했다 하면 일단 화부터 난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상관이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자신이 소속된 회사나 학교가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비논리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리고 평소에 그런 문제를 얼마나 입 아프게 지적했든지 간에, 평가가 내려질 시기가 되면 그 사람의 눈에 들기를, 그 조직의 평가에 적합한 사람이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고, 그 기준에 맞춰 행동하고 일하느라 스스로 기기묘묘해지고, 그러느라 진이 다 빠진다. 나를 평가하는 대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거기에 반발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이런 속담을 들려주며 자제시키곤 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모난 돌들로 인해 불합리와 비논리와 부정의를 고치고 쇄신하며 변화해왔다.

 

SNS로 권위적이고 위계적이었던 세계의 틀이 많이 붕괴된 것도 사실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SNS에 잠식당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좋아요’가 주는 즐거움에 취해 실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실제 나의 삶이 어떤 상황인지, 내가 가야 할 옳은 방향은 어디인지 종종 놓치게 된다. 게다가 나와 SNS 상에서 관계를 맺는 이들은 대체로 나와 취향이나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이다. 내 편을 들어주고 내 의견에 맞장구쳐주는 사람들 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틀 안에 갇히게 된다. 더 다양하고 더 많은 의견이 있는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임자헌 / ‘마음챙김의 인문학’중에서

 

 

햇빛보다 촛불이 더 나을 때가 있다

 

 

 

진나라 악사였던 사광은 이런 말을 했지

어려서 배우는 것은 해가 막 떠오르는 것과 같고

청년기에 배우는 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과 같으며

늙어서 배우는 것은 밤에 촛불을 들고 있는 것과 같다고

어려서 혹은 청년의 때에 배운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다 늙어 배우더라도 늦었다고 말하지 말일

촛불로 밤을 밝히더라도 어둠은 밝혀지니

촛불을 끄지만 않는다면 햇빛을 대신할 수 있다네

햇빛과 촛불이 다르긴 해도 밝혀준다는 건 똑같지

밝혀주는 건 똑같지만 외려 그 맛은 더욱 진국이라네

그래서 위나라 무공은 아흔 살에도 시를 짓고

늙을수록 점점 더 깊이와 넓이를 더해갔으니

그가 바로 나의 스승이라네

 

 

정호 (1648년(인조 26)~1736년(영조12)), 「장암집」권26

 

옛사람들은 늙어서 배우는 것은 세상을 밝히던 해가 다 져버리고 겨우 촛불 하나 켜서 방 안이나 밝히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 어릴 때, 젊을 때, 총기 좋을 때 공부하라고 권면하느라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요즘에도 비슷한 말을 한다. 어려서 공부해야 그나마 머리에 남는다고, 스물 다섯만 넘어도 배움에 나이 탓을 한다. 서른이 넘으면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핑계가 생긴다. 머리가 안 돌아가서, 도저히 외워지질 않아서 배우기가 어렵다고 말이다. 취미로 뭘 배워볼까 하는 사람들마저도 배움에 적극적으로 달려들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승진을 위해 꼭 필요한 공부가 아니면 무언가를 배우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배워도 그만 안 배워도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글을 썼을 때 정호의 나이는 63세였다. 이미 환갑도 다 지난 나이였다. 당시로 치면 완전히 노년인 셈이었다. 게다가 유배지에 있어서 마음이 심란할 때였다.

 

정호는 촛불로도 어둠을 밝힐 수 있다면서 그런 점에서는 촛불이나 햇빛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굳이 얼마나 넓게 얼마나 강하게 밝히는지 따지자면 촛불을 햇빛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어둠을 물리친다는 한 가지만 보면 햇빛과 촛불은 그 역할이 같다는 것이다. 게다가 밝음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만 하면 외려 햇빛보다 촛불이 낫다고 말한다. 문득 박노해 시인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는 시의 앞부분이 떠올랐다.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에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며 대지가 밝아질 때, 해가 중천에 떠서 온 세상을 환히 비출 때 우리는 밝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어둠의 공포를 알지 못한다. 당연한 것은 늘 소중하지 않다. 그래서 그렇게 환한 세상의 한복판에서는 밝음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다. 어둠이 찾아들어 빛이 절박해졌을 때, 어둠의 공포가 무엇인지 알았을 때, 비로소 빛은 소중해진다.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그래서 촛불이 어둠을 내몰고 비춰주는 빛이 진짜 제대로 된 빛이라고, 빛의 진국이라고 정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어리석다. 언제나 놓쳐야 가치를 깨닫는다. 부족해야 절박해진다. 어둠의 공포를 느낄 때 빛은 제 가치를 찾는다.

 

 

나이가 들면 기력이 쇠해져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지치고 힘들게 느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살면서 쌓은 모든 경험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그것이 다음 세대들에게 전해줄 작은 지혜라도 되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빛을 그리워하는 것도 습관이 아닐까? 어둠은 암순응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나이와 상관없이 어둠을 밀어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지금 바로 촛불을 켜보면 어떨까? 빛이 주는 기쁨을 누리는 습관을 들여간다면 올가을도 인생의 가을도 좀 더 찬란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임자헌 / ‘마음챙김의 인문학’중에서

 

* 위 글 제목 ‘햇빛보다 촛불이 더 나을 때가 있다’는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