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송담(松潭) 2020. 8. 29. 21:48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옛날부터 그림과 시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시는 모양이 없는 그림이고, 그림은 소리가 없는 시라는 말도 있었다. 이번에는 그림 이야기를 통해 시를 이해하는 공부를 해보기로 하자.

 

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않는다. 사물을 데려와서 사물이 대신 말하게 한다. 그러니까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은 시인이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고 시 속에 숨겨둔 말을 찾아내는 일이다. 이것은 숨은그림 찾기 또는 보물찾기 놀이와도 비슷하다.

 

이 점은 화가도 마찬가지다. 화가는 풍경을 그리거나 정물화를 그린다. 이때 화가는 화면 속에 자신의 느낌을 직접 표현할 수가 없다. 그림은 사진과 다르다. 화가는 색채나 풍경의 표정을 통해 자기 생각을 담는다

.

이제부터 살펴볼 몇 가지 이야기는 그림이 시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잘 보여 준다.

 

옛날 중국의 송나라에 휘종 황제란 분이 있었다. 그는 그림을 너무 사랑했다. 그림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훌륭한 화가였다. 휘종 황제는 자주 궁중의 화가들을 모아 놓고 그림 대회를 열었다. 그때마다 황제는 직접 그림의 제목을 정했다. 그 제목은 보통 유명한 시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었다. 한번은 이런 제목이 걸렸다.

 

꽃을 밟고 돌아가니 말발굽에서 향기가 난다.

 

말을 타고 꽃밭을 지나가니까 말발굽에서 꽃향기가 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황제는 화가들에게 말발굽에 묻은 꽃향기를 그림으로 그려 보라고 한 것이다. 꽃향기는 코로 맡아서 아는 것이지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보이지도 않는 향기를 어떻게 그릴 수 있올까? 화가들은 모두 고민에 빠졌다. 꽃이나 말을 그리라고 한다면 어렵지 않겠는데, 말발굽에 묻은 꽃향기만은 도저히 그려 볼 수 가 없었다.

 

모두들 그림에 손을 못 대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젊은 화가가 그림을 제출하였다.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그 사람의 그림 위로 쏠렸다. 말한 마리가 달려가는데 그 꽁무니를 나비 떼가 뒤쫓아 가는 그림이었다. 말발굽에 묻은 꽃향기를 나비 떼가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젊은 화가는 말을 따라가는 나비 떼로 꽃향기를 표현했다. 이런 것을 한시에서는 입상진의(立象盡意)라고 한다. 이 말은 '형상을 세워서 나타내려는 뜻을 전달한다' 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나비 떼라는 형상으로 말발굽에 묻은 향기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을 시에서는 이미지(image)라는 말로 표현한다. 시인은 결코 직접 말하지 않는다. 이미지를 통해서 말한다. 그러니까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은 바로 이미지 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 일과 같다.

 

다시 휘종 황제의 그림 대회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이번에는 이런 제목이 주어졌다.

 

어지러운 산이 옛 절을 감추었다.

 

절을 그려야 하지만 감춰져 있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화가들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그려야 할까? 한참을 끙끙대다 화가들은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대부분 산을 그려 놓고, 그 숲 속 나무 사이로 절 집의 지붕이 희미하게 비치거나, 숲 위로 절의 탑이 삐죽 솟아 있는 풍경이었다. 황제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때 한 화가가 그림을 제출했다. 그런데 그가 제출한 그림은 다른 화가의 것과 달랐다. 우선 화면 어디에도 절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깊은 산속 작은 오솔길에 웬 스님 한 분이 물동이를 이고서 올라가는 모습을 그려 놓았을 뿐이었다.

 

황제는 그제야 흡족한 표정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이 화가에게 1등 상을 주겠다."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황제가 설명했다.

 

“자! 이 그림을 보아라. 내가 그리라고 한 것은 산속에 감취저 보이지 않는 절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라고 했는데, 다른 화가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절의 지붕이나 탑을 그렸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절을 그리는 대신 물을 길으러 나온 스님을 그렸구나. 스님이 물을 길으러 나온 것을 보니, 근처에 절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산이 너무 깊어서 절이 보이지 않는 게로구나. 그가 비록 절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물을 길으러 나온 스님만 보고도 가까운 곳에 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것이 내가 이 그림에 1등을 주는 까닭이다.”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뛰어난 화가는 그리지 않고서도 다 그린다. 훌륭한 시인은 말하지 않으면서 다 말한다. 좋은 독자는 화가가 감취 둔 그림과 시인이 숨겨둔 보물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찾아낸다. 그러자면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 2>

 

자연이 주는 선물

 

 

자연은 모든 예술의 영원한 주제다. 자연은 말 없는 선생님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일깨워 준다. 자신을 닮으라고 한다. 예술가들은 넘치는 자연의 에너지에서 영감을 받는다. 이번에는 자연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있는 옛글과 한시를 감상해 보기로 하자.

 

조선 후기 이덕무가 지은 《이목구심서》란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지리산 속에는 연못이 있다. 연못가에는 소나무가 주욱 늘어서 있어. 그 그림자가 언제나 연못 속에 비친다. 연못 속에는 물고기가 살고 있는데, 그 무늬가 몹시 아롱저서 마치 스님이 입고 다니는 가사옷과 같다. 그래서 이 물고기의 이름을 가사어라고 부른다. 물고기의 이 무늬는 연못에 비친 소나무의 그림자가 변해서 된 것이다. 이 물고기는 너무 날쎄서 잡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이 물고기를 잡아서 삶아 먹으면 능히 병 없이 오래 살 수가 있다고 한다.

 

지리산 속에 있는 깊은 연못 속에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 연못위로 비치는 소나무 그림자를 보고서 자기 몸의 무늬까지도 그 그림자와 같게 만든 물고기가 살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칠 언제나 푸른 소나무의 기상을 닮아서, 삶아 먹으면 병도 없어지고 오래오래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

 

소나무의 무늬가 물고기에 비친다. 무늬가 물고기 위에 새겨진다. 그 물고기를 먹으면 소나무처럼 오래 살 수가 있다. 과학적으로 따지면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지만 옛사람들의 생각하는 방법을 알게 해 주는 글이다.

 

호랑이의 줄무늬는 가죽에 있고, 사람의 줄무늬는 마음속에 있다고 했다. 지리산 연못 속의 물고기는 소나무 그림자의 무늬를 간직하고 있다지만, 우리는 마음속에 어떤 무늬를 지니고 있는가? 소나무 그림자가 오래 쌓여서 물고기 무늬를 만들듯이, 사람도 사물에 내 마음을 주면 어느 순간 그 사물이 내 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옛사람들이 자연을 사랑하고 예찬한 것은 모두 이런 이유에서였다. 홀륭한 사람이 되려면 만 권의 책을 읽고, 먼 길을 여행 다녀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서를 많이 하고 여행을 많이 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책과 자연을 통해 듣든고 본 것들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나를 변화시킨다. 글을 쓰면 글에서 솔바람 소리가 울려 나오고, 그림을 그리면 도화지 위에서 꽃향기와 새소리가 퍼져 나온다.

 

정민/ ‘한시 이야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