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시간으로 빚어내다

송담(松潭) 2020. 6. 25. 15:53

시간으로 빚어내다

 

세월의 흐름에 따른 풍화현상을 자연스럽게 건축의 표정으로 승화시킨 

마르셀 브로이어의 바이엔코르프 백화점. 출처:구글맵 

 

 

인간의 노화와 마찬가지로 건축은 완성된 순간 절정을 맞이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풍화작용으로 퇴화해 결국 소멸에 이른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의해 건축물은 점차 침식되고 그 위에 공기 중의 오염물이 층층이 집적된다. 한편 이러한 빼기(침식)와 더해짐(오염)은 모두 그 건축물에 새겨진 소중한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은 마감으로 완성되나 시간은 다시 건축물을 마감하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내외부의 재료 마감을 건축물 완성의 최종단계로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건축학자 모센 모스타파비에 따르면 건물을 사용하기 시작함에 따라 시작되는 다양한 풍화작용에 의한 끝없는 노화와 변화가 실은 건축의 새로운 시작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건축이 영구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환경의 다양한 영향을 받아들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다 완성된 모습으로 만들어지기 위해 설계된 건축물도 있다.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가 1957년 로테르담 중심에 만든 바이엔코르프 백화점(사진)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트래버틴이라는 석회암으로 만든, 심심하리만큼 단순한 박스 형태의 상업건축이다. 바실리 체어와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 등 조형적 개성이 강한 브로이어의 작품이라고 하기에 처음 접한 완공 시점의 사진은 너무나 단조로운 인상이었다. 그러나 수년 전 현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 건축의 존재감은 경이적이었다. 외관의 트래버틴 석재는 건축사적으로 로마시대부터 널리 활용되어 왔다. 강도와 내구성이 우수한 반면 공기 중의 먼지들이 쉽게 거친 표면에 부착해 검은 얼룩이 생기는 특징이 있다. 브로이어는 역발상적으로 이러한 재료가 지닌 노화의 특성을 의도적으로 활용했다. 육각형 석재판의 일부분을 서로 다른 방향, 다른 깊이로 긁어내어 홈을 만들고 그 부분에 오염을 집중시켰다. 그럼으로써 비교적 덜 오염되는 나머지 부분들과 대조되며 시간이 만든 패턴이 건축가가 만든 육각형의 패턴과 중첩되며 오묘한 표정의 깊이를 가지게 된 것이다. 완성으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른 후 비로소 건축가의 의도를 명확히 읽게 된 것이다.

 

비단 이러한 풍화, 노화에 대한 생각은 단순히 건축의 외관과 같은 표피적인 요소에만 국한되는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속에 담기는 사회적 제도, 사람들의 생활방식, 시대의 가치, 용도 등 다양한 유무형의 것들도 포함한다. 나는 건축물이 사진처럼 특정 순간 동결 보존된 상태를 진정한 의미의 완성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에 따른 피할 수 없는 변화의 조건들을 슬기롭게 받아들이되 그것들이 더욱 본연의 의미를 풍성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본다. 마흔이 지나면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링컨의 말은 건축에서도 마찬가지다. 좋은 건축은 세월을 받아들이고 시간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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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만 / 건축가

(2020.6.25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