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고통스러운 상상, 질투

송담(松潭) 2020. 3. 30. 05:59

고통스러운 상상, 질투

 

 

 

 

남들이 나보다 잘났다고 느낄 때 시기하는 자의 비참함을 너무나 잘 보여주었던 영화가 기억난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이야기를 극화한 「아마데우스」이다. 궁정 음악가인 살리에리는 오래도록 고군분투하여 작곡한 행진곡을 황제 앞에서 훌륭하게 연주한다. 이날은 틀림없이 살리에리가 빛나야 하는 날이었다. 그의 음악이 모든 사람들의 기립박수를 받고 황제의 감탄사를 듣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하지만 행진곡의 마지막 음이 끝나자마자 느닷없이 새파랗게 젊은 모차르트가 피아노 앞에 앉더니 악보도 없이 한 번 들었던 살리에리의 행진곡을 경탄할 만큼 경쾌하게 변주까지 섞어서 연주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살리에리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고 모차르트만이 빛나고 있었다.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요.”하더니 모차르트는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천상의 음들을 만들어냈다.

 

모차르트의 등장으로 처참하게 패배감을 맛본 살리에리는 또다른 이유에서 이중적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살리에리에게는 오래도록 연정을 품었으나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여인이 있었다. 여인에 비해 자신은 너무 나이가 많았기에 남자로 다가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젊고 성욕이 왕성한 모차르트는 거침없이 그 여인에게 다가가서는 달콤한 키스로 단번에 유혹해 버렸다. 남몰래 흠모하고 가슴앓이를 하며 공들여 왔던 여인을 그토록 간단히 유혹해버리다니. 살리에리는 질투심으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이든 여자가 탱탱한 피부의 젊은 여자를 부러워하듯, 나이든 남자는 성욕이 왕성한 망아지 같은 젊은 남자를 부러워한다. 남자에게 성욕이란 여자에게 외모가 그렇듯 자신감의 원천인 모양이다.

 

노르웨이 출신의 상징주의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 1803 ~1944)가 그린 「질투」를 보면 한없이 무력해 보이는 남자가 그림의 전면에 등장한다. 그 뒤쪽으로는 포옹하는 두 남녀가 보인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이 남자를 질투심으로 몰고 간 원인이지 않을까. 그러니 이 방은 뭉크의 마음속이고, 두 남녀는 마음속에서 일어난 상상을 그린 것이다. 질투라는 것은 대부분 그렇듯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의 감정이다. 상대방을 의심하고 불안한 상상을 키워가는 것이 바로 질투다. 그 상상은 사랑함에 있어서, 또 사랑받음에 있어서 자신감을 결여한 자가 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뭉크의 경우는 과거에 사랑했던 연인에 대한 감정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아 심리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한 가운데 새로운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뭉크는 그 여인을 정신적으로나 성적으로 만족시킬 자신이 없었다. 사랑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서로 구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관계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으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에 질투가 대신 차지하고 들어와 마음을 온통 지배하게 된 것이다.

 

만일 스스로를 못난 사람으로 만드는 불청객들이 마음속에 버티고 있다면, 정말로 강펀치를 날려버려야 한다. ‘내 마음속에서 썩 꺼져버려!’라고 말하듯이, 남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바로 날려버려야 할 불청객들이다. 그 두 감정은 자신감과 만족감을 잠식시키면서 그 자리에 열등감과 패배감을 자라게 만든다. 행복이란 자기 충족의 마음 상태에서 생겨나는 것인데, 그것들로 인해 충족상태는 점점 결핍상태로 바뀌어버린다. 그럴 때가 바로 강펀치를 날릴 순간이다. 적어도 내 마음속에서 만큼은 나는 영원한 챔피언이다.

 

이주은 / ‘그림에, 마음을 놓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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