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로 본 르네상스

송담(松潭) 2020. 6. 19. 21:54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로 본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14-16세기에 유럽사회에 일어났던 전체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름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Renaissance는 재생·부활을 뜻하고, 특히 휴머니즘의 부활을 의미한다. 14-16세기 유럽사회에는 휴머니즘, 즉 인간성의 부활을 주장하는 운동이 전체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인간성이 살아 있었던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이러한 르네상스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전 유럽으로 번져 나갔다. 이탈리아에는 밀라노, 토리노, 베네치아, 제노바 등의 도시국가가 발전해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독특한 도시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 후원자는 잘 알려진 대로 유럽적 규모의 금융재벌 메디치 가(家)이다. 피에로, 코시모, 로렌초가 메디치 궁전과 정원에 수집해 놓은 미술품은 박물관 수준이었고, 특히 로렌초 공(公)은 날카로운 심미안으로 마음으로부터 전 방위적으로 예술을 후원했으며, 그것이 유럽 전체의 기준이 되었다. 이에 15-16세기 초의 피렌체 사람들처럼 열정적으로 문화에 헌신한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없을 정도였으니,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이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탐미적 경향"으로 기울였다면 북유럽의 르네상스는 "사회 개혁적 경향을 갖는다고 하겠다. 즉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도시국가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풍요로움 속에서 탐미적 경향을 띠어 휴머니즘을 부활시키는 새로운 예술로 나아갔다면, 북방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보다는 더 보수적이고 봉건체제가 공고히 남아있었기 때문에 휴머니즘의 부활을 논하기에 앞서 그 체제 개혁을 이야기해야 했다. 따라서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예술을 통한 탐미적 경향으로 나아갔다면 북방의 르네상스는 휴머니즘 부활을 위한 사회 개혁적 경향을 띠었던 것이다.

 

먼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르네상스는 가장 이탈리아적인 운동이고 미술적인 면에서 가장 높이 평가될 수 있는데, 15세기 이탈리아 회화는 자연미의 사실성과 원근법을 마스터한 결과로 탄생했다. 즉 그것은 고대 그리스 예술에서 드러났던 자연미를 원근법이라는 새로운 기법과 함께 다시 부활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르네상스 자연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르네상스 자연주의는 무엇보다도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조각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조각의 역사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는, 자연미의 극치를 보여 준다. 특히 충분히 다 칭찬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으로 만들어진, 기술적인 어려움이 탁월하게 극복된 작품이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가장 뛰어난 조각작품이라 평가되는 <피에타>는,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종교와 고전의 아름다움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조화와 균형미의 극치를 보여 준다. 이렇게 부활된 고대, 비례와 좌우대칭 속에서 쉬지 않는 인간이 마침내 평화를 얻게 된다고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회화작품으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최후의 심판>에서 그렇듯이 343명의 인체의 자연미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인체에 대한 관심이 신앙심을 누르고 승리하는 작품이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장식한 이 그림은, 그리스인들처럼 얼굴과 표정보다는 신체의 구조에 관심을 갖고서 그려진, 아름답다기보다는 에너지와 생명의 끈질긴 구현을 보여 준다. 이 <천지창조>의 한 부분인 <아담의 창조>는 창조주가 공중으로 날아가면서 흙으로 아담을 빚어내는 천재의 숨결 속에서 인체가 자세를 바꿀 때 생기는 변화에 관심을 갖고 그린 해부학이라 하겠다.

 

 

또 다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천재화가, 아니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과학자이자 엔지니어이며 사상가를 합친 사람, 즉 르네상스의 보편인(전인), 레오나르도 다비치(Lconardo da Vinci, 1452-1519), 그의 유명한 작품 <모나리자>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오묘한 미소, 모나리자의 미소를 간직하고 있다. 또한 그의 <최후의 만찬>은 이상적인 원근법에 입각하여 예수님의 12제자가 각각 4명씩 3무리로 배열되었는데, 그것이 4복음서와 삼위일체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렇게 르네상스 회화는 감각적인 예술이고, 이 감각성이야말로 오랫동안 구박받아온 육체, 즉 인간의 건강한 삶과 그 사랑스러움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로써 르네상스는 중세의 원죄와 회개의 공포, 즉 죽음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얼굴을 삶으로 향하는 환희의 송가를 노래한 것이다.

 

박유정 / ‘문화 텍스트로 보는 서양사’중에서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꽃의 도시 피렌체는 르네상스 시대를 가장 먼저 꽃피우고 발전시켰던 도시다. 예술과 학문의 도시 피렌체의 찬란한 역사는 세계역사와 문화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거리를 걷다보면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도시 전체가 정교한 예술품으로 꽉 찬 느낌이다. 웅장한 건물과 천재들이 지어놓은 도시 곳곳의 신비와 황홀은 마치 박물관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거리곳곳에 있는 모든 것이 신기하다. 이 도시는 메디치 가문이 이루어놓은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적한 시골마을 무겔로(mugello) 지방의 조그만 농장주였던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은행업을 하면서 크게 성장한다. 그 후 모직물에서 많은 돈을 번다. 가문을 일으킨 조반니 데 메디치, 그의 아들 코스모 데 메디치는 은행가로서 정치가로서 변화가 극심했던 당시의 이탈리아 정치상황에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다. 메디치 가문을 크게 일으킨 그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는 문화, 예술, 학문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르네상스가 발흥(勃興)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았고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가 있었고 탁월한 통찰력으로 가문을 융성 발전시키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수많은 예술가와 인문학자와 과학자를 후원했다. 암흑의 중세시대를 접고 찬란한 르네상스 시대를 활짝 여는데 앞장을 선 예술과 문화에 대한 정성과 열정이 대단했다.

 

메디치 가문은 1397~1743년 346년간 유럽최고의 귀족가문이었다. 두 명의 교황과 프랑스 왕비 두 명을 배출한 명문가다. 그리고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오 갈릴레이,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토첼리, 티치아노,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등등 수많은 천재들을 정성껏 후원하고 배출했다. 이들의 탁월한 재능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인류문명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영광과 온갖 좌절을 겪은 메디치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인 안나 마리아 데 메디치는 몰락한 가문의 재산을 현명하게 정리했다. 가문이 수 백 년 동안 모아온 소장 예술품과 수집품 모두를 국가에 헌납하고는 “단 한 점도 피렌체 밖으로 옮기지 말 것” 이란 유언을 남기고 가문(家門)을 닫는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은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가문의 혈통은 끓어졌지만 메디치 가문의 영광은 지금도 살아 있다.

 

그 덕으로 피렌체는 아름다운 조각과 예술품들로 가득해지고 전 세계 사람들의 관광발길을 유인한다. 메디치 가문이 남긴 막대한 문화유산은 피렌체의 관광산업을 엄청 발전시켰고 오늘날의 피렌체 시(市)는 많은 관광수입으로 건전한 재정을 유지하고 있다. 메디치 가문의 문화예술에 대한 후원규모는 지금 돈으로 약 일조원에 육박할 정도였다고 한다. 돈은 시대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고 중요한 자극제였다. 메디치 가문의 돈이 르네상스라는 근대정신을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고 사람의 마음에 창조와 희망 그리고 열정의 바람을 일으켰다.

 

가문을 유지하는 동안 메디치가는 숱한 곡절을 겪으면서 여러 위기를 만나지만 불사조(不死鳥)처럼 살아났다. 문화, 예술 그리고 종교와 여러 분야에 걸쳐 넓게 자리 잡은 그들의 영향력을 반대파들도 무시할 수 없었다. 메디치가는 인간의 행복과 번영을 소중히 여기고 예술을 사랑하고 깊고 넓은 학문을 추구했다. 한 번 맺은 신의(信義)는 손해를 무릅쓰고라도 지켰고 사람의 내면을 풍성하게 하면서 미래를 위하여 참을 줄을 알았고 겸손을 미덕(美德)으로 삼았다. 언제나 검소하고 소탈하게 살려고 노력한 끝에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다음 이탈리아를 또다시 갈 일이 생긴다면 나는 오직 피렌체 한 곳에서 며칠간 머물 것이다. 거리 곳곳을 살피면서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보물이 가득한 우치피 미술관에도 하루 종일 천천히 돌아다닐 것이다. 옛날 로마병사의 힘찬 말발굽 소리를 들으면서 어느 길모퉁이에서 우두커니 혼자 서 있기도 할 것이다.

 

윤행원 / 석계글빙에서, 한국수필(2016년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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