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 문화예술

인간의 흔적이 묻은 것이 아름답다

송담(松潭) 2020. 3. 10. 23:03

인간의 흔적이 묻은 것이 아름답다

 

 

 

일본 시마네현에 아다치 미술관이 있다. 이 미술관은 1970년 기업가 아다치 젠코가 연 개인 미술관이다. 개인 미술관이지만 컬렉션이 어마어마하다. 일본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이 미술관에는 이런 소장품보다 더 유명한 것이 있다. 너른 면적에 꾸며진 정원이다. 일본 정원의 아름다움에 빠진 아다치는 전국의 유명한 정원들이 가지고 있는 요소들을 집대성해놓았다. 모두 여섯 개로 나뉜 정원에는 일본 전역의 나무와 돌이 수집되어 있다. 아다치 젠코는 92세로 죽었다. 죽기 직전까지 이 정원을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자수성가한 기업인은 자기 고향에 평생 꿈꾼 정원을 만들었다. 아다치의 정원은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일본 정원의 요소들을 한곳에 모아둔 종합선물세트 같다. 그런데 이렇게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조화롭다. 놀라운 일이다.

 

내가 아다치 미술관에 간 건 1990년대 후반이었다. 아다치의 정원을 보고 나니 인간이 왜 정원을 만드는지, 왜 정원이 인간이 만든 예술품인지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은 왜 정원이라는 걸 만들게 되었을까.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보자. 이 정원을 보면 분명하게 설명이 된다. 왕이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자 했던 의도가 바로 느껴진다. 권력의 시선을 무한히 확장하려는 욕구가 이 정원의 존재 이유이다. 시아를 극한으로 확대하겠다는 욕구가 원근법적 조성으로 구현된 정원이다. 이처럼 서양에서 정원은 왕실, 가문 등 권력 집단이 이상향을 구현하는 수단이었다.

 

일본의 정원은 독특하게 개인의 취향이 극대화된 곳이다. 개인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낙원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정원 문화가 발전해갔다. 이는 일본의 정치체제와 연관있다. 절대 왕조의 힘이 강하지 않고, 수많은 가문이 돌아가며 권력을 차지했다. 그래서 각 권력자들은 각자의 부와 명예를 표현하기를 원했고, 각자가 내거는 이상향이 따로 있었다.

 

이런 권력자 개인의 과시욕과 이상향을 자연을 모방하여 우회적으로 드러낸 미감의 정원이 유행했다. 일본의 정원은 화려하지는 않으나 세련되다. 넘치지 않으나 모자라지 않다. 고즈넉하고 쓸쓸하나 힘이 있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개념이 바로 와비 사비이다. 와비 사비는 일본의 전통적인 미의식 관념으로 부족하고 검소한 상태, 적막하고 조용한 상태를 가리킨다. 일본의 정원을 보면 공들인 멋진 정원 한구석에 허름한 초가집 같은 다실이 있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이들이 가진 와비 사비 미의식이다.

 

일본 교토와 시코쿠 일대의 옛 정원을 돌아보면 아다치 미술관이 더 잘 이해된다. 아다치 미술관은 일본 정원의 에센스만 뽑아 얄밉도록 자연스럽게 완결하는 데 성공한 현대의 정원이었다. 아다치는 일반에게 정원을 공개하면 훼손될 위험이 있으므로 주변에 회랑을 둘렀다. 그리하여 관람객들이 밖에서 정원을 바라보게 했다. 사진의 프레임마냥 사각의 창으로 잘려진 정원을 보는 관람객은 만든 이가 의도한 대로 반응하고 느끼게 된다. 마음껏 펼쳐진 공간에서는 오히려 스쳐버리기 쉬운 아름다움의 핵심을 완성된 형태로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지극히 인위적이다. 하지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한 조화는 어떤 비판도 구차하게 만든다. 완결된 아름다움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 자연을 재료로 인간의 미감을 더해 완성된 공간은 황홀하다. 이상하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조화의 아름다움이 오로지 한 인간의 선택과

의지로 완결된 셈이다. 자신의 혼적을 영속시키기 위해 사업가는 정원을 미술관이라 이름 붙이고 유료 관객을 받아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묘책을 찾았다.

 

나는 아다치 미술관을 통해 정원이 인간의 이상향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이유를 실감했다. 왜 정원을 명화처럼 감상하는지도, 왜 전 세계 예술가들이 일본의 정원을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손꼽는지도 이해했다. 한때의 관심으로 사라지고 공간이 아니라 낙원이라 불러도 좋고, 왕국이라도 불러도 좋은 곳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능력. 나에게는 인간이 자연을 억지로 가공하는 일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아다치의 미술관처럼 극진한 아름다움은 무소불위의 권력 같아서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힘이 있다. 그래서 아름다움의 구체적 실현인 예술품을 보고 미의 권능을 인정하게 되면, 뒤이어 미술관, 음악홀, 거장의 건축물로 발길이 옮겨진다.

 

중국 회화에서는 예술의 최고 목표를 ‘기운생동(氣韻生動)’으로 삼았다. 자연물이 아닌데, 인간이 만들었는데 살아 있는 듯한 에너지는 내는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것이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살피는 능력 또한 인간의 것이다.

 

 

 

 

< 2 >

 

나는 얼마나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나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그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이 깨어나는 건 편견 없이 바라보고, 한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이다. 다가가지 않는데 어떻게 수용력이 생기겠는가. 사람들은 미적 감각을 특별한 능력처럼, 타고난 재능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반대다. ‘알아야 보인다’는 말은 ‘다가서야 느끼고, 경험해야 보인다’로 바꿀 수 있다.

 

심미안은 타고난 능력이라기보다 커가는 능력이다. 스스로 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온갖 곳을 돌아다녔다. 보고, 맛보고, 듣고, 느끼고, 무조건 경험했다. 책과 텔레비전을 통해 아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책에서 본 그림을 실제로 보았을 때 느껴지는 바가 바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왜 그렇게 다를까. 왜냐하면 실물을 마주했을 대야 비로소 그것을 그린 사람의 의도와 그 작품이 놓여있는 맥락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하게 그림의 크기를 확인하는 일도 그렇다. 이중섭이 껌 종이에 그린 그림을 책에 인쇄된 확대된 사진으로 보는 것과 그 작은 실물을 눈으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 화가가 당시에 처했던 상황, 이런 재료를 선택한 이유, 그 재료에 선을 그을 때의 느낌, 이런 것까지 확인되면 짐작했던 것과 다른 감각이 내 몸을 통과한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바이올린 선율을 귀로만 듣는 것과 그것을 켜는 사람의 손놀림을 눈으로 보면서 듣는 것은 확연하게 다르다.

 

 

윤광준 / ‘심미안 수업’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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